유리창 하나 깨어지지 않은 독일의 통일과 일전불사의 대통령
안보문제는 교육, 산업, 경제, 복지 정책을 넘어 치명적인 문제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유례없는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대통령은 일전불사의 결기로 적 도발을 응징하겠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크리스찬 데이비스 서울지국장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서울에 있는 내가 실제로 생존할 가능성이 ‘0’보다 약간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반도 전쟁 준비의 교훈’이라는 칼럼을 통해 “한반도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자국민들을 대피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가?”라고 한 외교관에게 질문한다, 그의 답변이다.
“이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개전 초기 남과 북의 화력이 매우 큰 데 비해 서울과 평양 사이 거리가 가까워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모두 끝날 가능성이 있다.”
전쟁은 완벽한 무(無)
북한은 지난해 9월 핵 무력 정책을 법제화했다. 김정은이 사망한다고 할지라도, 핵은 자동으로 발사되게 입법화했다. 미국을 겨냥한 전략핵이 아닌, 한반도를 겨냥한 전술핵은 핵 지뢰, 핵배낭뿐 아니라 방사포를 통해서도 한반도를 일순간 초토화할 수 있다. 김진향 한반도 평화경제회의 의장은 현대의 전쟁은, 특히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완벽한 무(無)의 상태’라고 정의한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無)의 상태로 만든다. 악도 선도 의미 없다. 사람도, 생명도, 물질도, 건물도, 재산도, 공동체도, 가족도, 윤리도, 도덕도, 가치도, 규범도, 질서도, 진보도, 보수도, 자유, 인권, 평등, 정의, 불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역사나 미래도, K-팝도, 한류도, 모든 것을 완벽한 무로 만든다. 그 완벽한 무의 상태, 즉 회한도, 슬픔도, 눈물도 존재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인간을 집단적인 환각 상태로 몰아가서 가장 이성적이라는 인간을 가장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집단적 환각 상태의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인한 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모두 겪게 된다. ‘모든 존재하는 것으로부터의 악’을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관념 속에서 처참하다라고 정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쟁은 이 모든 것을 무의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위기가 한반도에 직면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의 전쟁은 100% 자동으로 미국의 본토와 일본까지 포함되는 거대한 전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전불사의 결기로 적 도발을 응징’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과 안보의식은 참으로 안타깝고 두렵다. 미국마저도 윤대통령의 결기를 우려하고 있는 지경이다. 안보의 영역은 전쟁과 직결된다. 복지, 사회, 경제, 산업, 교육 등 수 많은 정책이 의미 없다. 결국은 평화다. 안보를 넘어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범국민적인 공감과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조용한 평화 혁명 그리고 통일로
전 국민의 생존을 책임진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일전불사’를 외치고 있으나, 독일의 통일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기적 같은 평화의 운동으로 이루어졌다. 게르만 민족의 역사에 비폭력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민족이다.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유대인을 대학살 시킨 민족이다. 그런데 이들의 통일이 비폭력, 무혈의 평화 운동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 않은가? 이 거대한 기적의 시작은 독일(동독) 라이프치히(Leipzig) 니콜라이교회(Nikolaikirche)에서 시작되었다. 위대한 정치가나 사회적 지도자가 아닌, 한 교회의 목사였던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 1943-2014)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독일 통일의 기적은 평화로 시작되었다. 최용준 한동대 교수의 논문(독일의 통일과 교회의 역할: 크리스티안 퓌러를 중심으로)을 통해 이러한 평화의 기적을 잘 살펴볼 수 있다.
퓌러의 사상 및 사역의 핵심은 ‘평화’였다. 라이프치히는 30년 전쟁과 나폴레옹의 침입,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의 4분의 1이 파괴되기도 했다. 그랬기에 니콜라이교회는 절대 가치를 평화에 둔다. 니콜라이(Nikolai)는 헬라어로 니코스(Nikos, 승리자)와 라오스(Laos, 백성)의 합성어다. ‘승리자는 백성이다(Sieger ist das Volk. Winner is the people)’라는 의미다. 퓌러는 1980년대 초반 매년 가을 열흘간의 기도회를 개최한다. 이 기도회와 함께 평화 행동을 지향하고, 군비증강 반대, 군사적 행위 반대와 학교 교육에서의 군국화 사고에 반대하는 평화적 시위를 시작한다. ‘기도와 행동’(Beten und Handeln), ‘교회와 세상’(drinnen und draußen), ‘제단과 거리’(Altar und Straße)는 하나였다. 1986년, 요한복음 6장 37절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따라 니콜라이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Nikolaikirche–offen für alle)’는 슬로건으로 청년들의 팝 콘서트, 동독 사회의 소외된 계층, 심지어 시위대에게도 교회 문을 개방한다. 이는 비그리스도인들도 품기 시작한 것이었고, 그들의 마음이 교회로 향할 수 있도록 했다. 교회에서 자유와 복음의 능력이 체험되기 시작했고 사회에서 벙어리와 같던 사람들이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이 되었다. 이러한 가치와 지향이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영적, 정신적인 중심이 되었고 동독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의 본거지가 되어 결국 평화 통일이라는 기적의 열매를 맺게 된다.
1987년에는 스웨덴 총리로서 한때 핵무기 경쟁을 반대하면서 동서 간의 150킬로미터를 핵무기가 없는 지대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던 올로프-팔매(Olof Palme)의 평화순례 대행진을 처음으로 주관한다. 1988년 2월 19일에는 “동독에서의 삶과 체류(Leben und Bleiben in der DDR)”라는 강연회에서 동독 정권의 해외여행을 금지에 대한 정책적 반대 운동을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재야인사들이 참여하게 되고, 해외 이주를 하려는 젊은이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동독 호네커(Erich Honecker) 정권에 대한 저항의 구체적인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퓌러는 이 평화기도회에서 일관되게 평화의 복음을 선포한다. 예수의 산상 수훈을 본문으로 평화에 관한 메시지를 전한다. 세상의 권력과 무력의 상징인 로마 제국의 평화(pax romana)가 아닌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순교하며 주장하였던, 무기를 제거하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시며 전쟁을 중단하셔서 하늘의 평화를 가져오신 하나님의 평화만이 잔인한 충돌과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음을 설교한다. 비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퓌러의 설교로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난 모든 시위는 비폭력 시위로 이뤄진다. 또한 그는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면서 내세운 이사야 2장 4절과 미가 4장 3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으로 ‘칼을 보습으로(Schwerter zu Pflugscharen)’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이는 수많은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위를 진압할 모든 준비가 되어있던 경찰들과 군인들조차도 무기력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이 평화기도회는 동독 전역에 알려지게 되고, 드레스덴 등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1989년 동독 정권은 이 기도회를 억압하고 중단시키려 했다. 교회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였고 교회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평화기도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철옹성 같은 동독 정권과 베를린 장벽을 여리고성 무너뜨리듯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만든 시발점이 된다.
1989년 9월 4일부터 ‘평화기도회’는 ‘월요 평화시위’로 평화의 힘이 큰 물결이 되어 간다. 평화기도회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시민들도 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슈타지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리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약 1천 명의 시민들로 시작된 평화시위가 9월 25일에는 8천 명, 10월 2일에는 2만 명이 함께한다. 이에 동독 정권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한 달 전인 1989년 10월 9일, 8천 명의 군인과 경찰병력을 니콜라이교회 앞에 집결시킨다. 오후 2시부터는 비밀경찰 요원과 당원들 600여 명을 교회에 몰래 침투시킨다. 그럼에도 평화로 진행되는 예배와 퓌러의 복음으로 무혈충돌은 1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기도회가 끝나고 교회 문이 열렸을 때, 감동의 광경이 펼쳐진다. 2천여 명의 사람들이 교회 문을 나섰을 때 교회 마당과 주변 거리에는 만여 명의 사람들이 손에 초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초는 비폭력을 의미했다. 초를 들고 다른 한 손은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야 했기에 돌이나 몽둥이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시내를 향해 갔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폭력을 거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평화로운 “힘”이 그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수많은 인파 속에는 당연히 폭동을 계획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도발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초를 들고 “비폭력”이라는 구호와 함께 그들을 막아섰던 것이다. 창문 하나 깨어지지 않았으며 다친 사람도 한 명 없었다. 군중 중 일부는 투쟁적이고 무신론적인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의식적으로 폭력에 저항하겠다고 결정했다.
비폭력의 전통이 전혀 없고 오히려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켜 무지막지한 폭력을 유대인들에게 행사했던 게르만 민족에게서 독일 역사상 최초인 무혈 평화 혁명이 기적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대중적 비폭력 운동은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0월 16일에 라이프치히에는 1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비폭력적 평화 운동에 참여한다. 11월 6일에는 무려 40만 명으로 늘어났다. 참조로 당시 라이프치히 인구가 55만 명이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10월 18일 호네커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호네커 서기장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고 서독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의 리더십 아래에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법적으로 통일되었다.
일전불사가 아닌 평화의 기적을
독일 교회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쟁의 참혹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뼛속 깊이 깨달았다. 평화는 독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념이요 신앙이었다. 자녀들에게는 평화를 교육하고 교인들에게는 평화를 설교했다. 국가에게는 평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요구했다. 이것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었다. 따라서 독일 교회는 서방의 냉전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목회자들은 바르멘 선언을 지지하며 동서 화해와 이념 갈등의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 분단 중에도 만남과 교류를 추진하였고, 서독 교회는 ‘디아코니아재단’을 통해 동독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계속했다. 디아코니아의 지원이 동독 교회의 평화 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남북의 교회는 이데올로기의 시녀가 되었었다. “전쟁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상징인 십자가가 이제는 전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전쟁터 각 진영에서는 승리를 기원하는 미사(예배)가 봉헌된다. 이보다 더 흉측스러운 일이 어디 있는가”라는 에라스무스(1517)의 말처럼, 이 파괴적 전쟁에 남북의 교회는 시녀가 되어 서로의 승리를 기원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희생과 파괴의 상처만 남긴 전쟁, 다시 그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군국통수권자가 지금의 대통령이다. 이제는 이에 동조하는 한국교회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요청한다. 세상의 폭력적 방식을 거부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에 화해를 이룬 예수처럼, 희생과 화해와 평화의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를 간절히 기다린다.
신앙은 신념을 지켜내는 힘이다. 선거 때만 되면 교회와 사찰을 쇼핑하는 거짓 신앙인이 아닌, 평화의 신념을 지켜낼 지도자가 절실하다. 기도하는 지도자를 잃어버린 시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일전불사’, ‘확실한 응징’, ‘우월한 전쟁 준비’ 등의 명령을 뱉어내는 꼭두각시가 아닌 평화와 안보를 지켜낼 진심으로 기도하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칼과 창을 쳐서 보습과 낫을 만드는”(미 4:3) 평화의 리더십을 가진 자 그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