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필드) 진용준 기자 = 세계 최고의 반도체 강국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가장 위험한 유해물질 공급과 폐기물 처리를 담당하며 병들어가는 하청노동자들의 참혹한 실태가 드러났다.
뇌종양으로 숨진 40대 노동자와 폐암 투병 중인 현장 작업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집단 산재를 신청하며, 삼성과 정부를 향해 근본적인 안전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 14년 ‘화학물질 공급함’ 지킨 노동자의 죽음… “CCSS룸은 안전한가”
10일 오전 11시,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는 고인이 된 하청노동자 이 모 씨(42)의 유족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모였다. 이 씨는 삼성반도체 화성사업장 내 화학물질공급시스템(CCSS) 룸에서 14년간 설비 유지보수와 화학물질 충전 작업을 수행해왔다. CCSS룸은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각종 유해 화학물질이 집결된 곳으로, 지난 2013년 치명적인 불산 누출 사고가 발생했던 바로 그 장소다.
이 씨는 매일같이 유해 물질에 노출된 환경에서 분투하다 2024년 2월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불과 1년 5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유족들은 고인이 10년 넘게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들이마신 화학 가스가 죽음의 원인이라며, 이를 명백한 직업성 암으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 “먼지가 태풍처럼 날렸다”… 하청에 집중된 ‘위험의 외주화’
비극은 이 씨뿐만이 아니었다. 기흥과 화성사업장에서 반도체 폐기물(슬러지) 처리와 배관 청소를 담당했던 또 다른 하청노동자 역시 2022년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그는 폐액을 고체화하는 탈수기 작업 과정에서 방진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미세 분진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고 증언했다. “마스크를 써도 코 안쪽까지 먼지가 까맣게 앉을 정도였다”는 그의 말은 반도체 산업의 가장 밑바닥 공정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이재명 정부가 산업재해 감축을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강력한 규제를 공언하고 있지만, 정작 반도체 공정의 유해 화학물질로 인한 직업병은 여전히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사고성 재해와 달리 뇌종양이나 백혈병 같은 질병은 인과관계 입증이 까다롭다는 점을 악용해 기업과 정부가 실태 조사에 소홀했다는 비판이다.
이번 집단 산재 신청은 반도체 산업의 ‘클린룸’ 신화 뒤에 숨겨진 하청노동자들의 희생을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시민사회는 단순한 개별 산재 인정을 넘어, 하청노동자들에게 집중된 유해 업무의 안전 관리 체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전수 조사를 실시할 것을 삼성과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측은 협력사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법적 기준보다 엄격한 보호 장구 지급과 환경 개선 노력을 지속하고 있으며, 관련 당국의 산재 심사 과정에 성실히 협조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