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에게 혹독한 빵 조각이 아닌 정당한 생존권을
출산과 육아의 단절을 의미하는 ‘인구절벽’은 미국의 경제학자 ‘해리 덴트’가 제시한 개념이다. 생산가능인구 비율이 급속히 줄어드는 현상의 인구통계학적 표현이다. 그는 한국도 2018년경부터 인구절벽에 직면해 경제 불황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제 인구에서 인간으로
인구 통계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개인들이 아닌 집단을 이루는 인구다. 통계와 숫자에 익숙한 탓일까. 우리의 인구절벽 문제를 비롯한 삶의 대책들은 늘 실상과는 괴리된 관점에서 맴돈다. 개인들 삶을 ‘사람들’의 묶음으로 이해해온 우리사회의 오랜 집단적 인식의 영향도 크다. 개인주의라는 역사적 과정을 채 경험하지도 못한 채 밀려들어온 자본주의가 우리 삶을 철저히 개인화 시켰지만, 불행히도 권위적인 가족중심 사회의 가치를 스스로 새롭게 정립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현실이 우리 인식의 틀 속에 그대로 머물 리도 만무했다. 집단적 삶이 해체되고 개인들이 점 단위로 연결된 온라인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청년들에게 그런 가족단위, 묶음단위의 삶은 혼란스럽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혼란 속에 그대로 뿌리 내린 경쟁체제는 심화되어가는 만큼 인식의 차이도 벌어지고 있다.
청년들은 이런 묶음처리 방식의 진원지라 여기는 기성세대와 정치인들을 ‘꼰대 세대’라며 반발하곤 한다. ‘우리 때’, ‘요즘 애들’과 같은 집단적 인식의 훈계에 ‘지금’, ‘나’라는 개인을 강조하며 맞선다. 결혼, 육아라는 관습적인 공식도 경쟁적 삶에 걸맞지 않는 모험으로 느끼는 것 같다. 차라리 주어진 여건에서 소박한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추세다.
그런데 최근 ‘인구에서 인간으로’라는 프로그램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이 복잡한 인구절벽 문제를 EBS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 것이다. 개별 인간들의 관점, 특히 청년들의 삶과 여건들, 그런 환경에 놓인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양한 생각들을 듣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매우 고무적인 변화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정책에 담아 추진해갈 정부와 정치권의 인식은 아직 아득히 멀다. 공동체, 지속성과 같은 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권력의 주변은 갈라치기와 피 터지는 이전투구로 각개전투가 한창이다. 구한말 수난의 한반도가 떠오를 지경이다. 자칭 진보라는 정치권도 기본적 인식의 한계에 있어서는 공통적이다. ‘인간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에 기대했던 문재인 정부도 그저 구호로 끝났다. 노동정책을 펼쳐가는 방식과 과정에서 ‘먼저여야 할’ 그 인간들은 늘 뒤로 빠져 있었고 밀어붙이기 방식의 뒷전에서 좋은 결과만을 받아먹으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받았다. 인식구조와 수준을 넘지 못한 채 흘러간 5년이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정책의지가 구호로 끝나버린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처럼 인간 삶을 인구로 치환해버리는 거친 인식의 한계는 스스로 문제의 본질을 놓아버리곤 한다. 그저 수당이나 주고 집을 싸게 공급하겠다는 권위적인 배급 방식처럼 약간의 산소공급으로 심각한 동맥경화증 상태를 연명해보겠다는 식이니 반응도 싸늘하다.
흔들리는 생존기반 위에 들이대는 법치는 폭정의 도구일 뿐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단절시키려는 인구절벽 현상, 현재의 삶을 마감하려는 극단적 사건들 속에는 취약한 사회 기반과 규범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했을 현실의 개인들이 있다. 물론 장발장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루며 규범에 저항한 경우도 있긴 하다. 그는 한 조각의 빵을 훔쳐 죽음을 극복하고 생존했지만 5년간의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19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의 거친 시대상에서의 일이다. 150여년이나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라면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급박하게 빵 한 조각이 생명을 구했던 그 시대 장발장이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저항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돈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물 한 모금, 휴지 한 조각조차 얻을 수 없다. 빵 말고도 전기•수도•가스요금 등 다달이 날아오는 갖가지 청구서들이 생존의 징표가 되었다. 청구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각종 법령들의 행정제재가 여지없이 시작되고 생존 기반들도 흔들린다. 싸늘한 주검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극심했던 고통도, 다급함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익명성 사회다. 원초적이고 직접적이었던 빵의 상징성이 청구서로 은폐되고, 청구서를 구입할 힘은 한정된 일자리에서 나오는 임금뿐이다. 그런데 그 임금의 최저 생계선을 지키려는 저항조차 경제를 위협하고 방해하는 것으로 비판받곤 한다.
현 정부 들어 이런 권위적인 인식과 움직임은 더욱 심각해졌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 화물연대 파업 등 노동자들의 빈곤한 삶이 드러나는 현장마다 법의 칼날은 무서울 만큼 날카롭다. 20년 이상의 숙련 노동자가 최저임금으로 살고 있었던 현실, 한 번 떠나면 누구도 쉽사리 들어오려 하지 않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전 국민이 이용하는 도로에서의 위험천만한 질주를 멈춰달라는 안전운임 파업에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임금수준임을 알게 됐다. 막다른 골목의 이들이 범법자가 되지 않도록 먼저 대화를 유도하고 중재하는 것이 정부 역할이었지만, 오히려 이들을 적대시하며 공권력 투입부터 거론하고 강제해산을 압박했던 정부와 대통령에게서 행정부의 역할이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본과 노동이 원활하게 공급되어야만 자본주의가 돌아간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나라들이 먼저 도입한 두 가지 기본 제도가 있다. 하나는 계약자유의 원칙을 실현할 시민법체계였고, 다른 하나는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줄 복지체계였다. 실제로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유독 인류애가 강해서 최초로 사회보험법과 복지체계를 도입했을까? 그렇지 않다. 사회주의 등 여타의 체제로부터 자본주의를 지켜내고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자본의 역사를 현 정부가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비스마르크 시대의 그 사회보험제도가 발전해 오늘의 복지 기반이 되었고 국가가 운영을 담당한다. 또한 자본과 결코 대등한 관계일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실질적 평등과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한 노동법도 제정된다. 이 노동법은 최소한의 노동 기준과 이를 지켜낼 수단인 노동3권도 함께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노동3권, 복지제도는 결코 은혜적인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장치들이었다. 그런데 우리사회로 넘어온 이런 제도들은 여전히 게으른 사람에 대한 은혜적 베풂으로 이해되는 분위기다.
대우조선해양 파업과 화물연대 파업, 제대로 복기해보자
이번 조선소 파업. 화물 운송 파업은 그런 의미에서 차분히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법치국가의 노동자들이 준법 대신 탈법논란을 무릅쓰면서까지 저항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들은 그저 폭력배에 지나지 않았나? 집단행동을 잔인하게 진압하려 할 때 정부는 법치를 외치곤 한다. 그러나 법치는 진정 만능일까? 최저생계를 외치는 사람들 처지를 이해하지 않는 법이라면 도대체 그 법은 누구를 위한 법인가. 모든 사회 문제들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고 방치한다면 국가의 존재의미는 무엇일까? 심각한 양극화로 생존형 탈법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생존기반이 취약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들이다. 정부는 그들에게 왜 법대로 파멸을 택하지 않고 탈법을 택했는가라고 질책하기보다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시행한지 고작 1년 된 중대재해처벌법이 효과가 없었다며 처벌 위주가 아닌 예비관리 방향으로 개정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나온다. 수십 년 간 재해위험성이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것이 문제라면 적어도 그 관리를 정상화시키기까지 원상복귀식 개정은 미뤄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경영자를 피의자 취급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노골적 두둔도 언어도단이다. 피의자 취급하는 건 문제가 되고 해마다 2천명의 이유 없는 죽음들은 당연시해도 괜찮은가? 이는 정부 스스로 주장하는 그 ‘원칙’에 합당한가 돌아볼 일이다. 극단적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생계형 존•비속살인, 우리사회 하위노동자들의 잇단 저항들,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수많은 업종들을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분신자살들과 사고들을 그저 지우기에만 바쁘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더니 눈 떠보니 후진국 노동자들이다.
이런 정부인식의 밑바탕엔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감이 있고 그대로 드러내는데 주저함도 없다. 물론 일부 노동조합과 양대 노총은 이미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권 못지않게 권력화 되었고 경직된 조직 문화와 드러나는 부패 양상들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을 모든 악의 근원인양 지목하고 적대시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노노간 임금격차, 논란 속의 연공형 임금구조 등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화살이 온통 노동조합을 향하는 것 또한 정당화 될 수 없다. 불평등 고용구조, 이중구조의 원인인 다단계 하청구조, 산업의 이중구조를 돕고 오래 방치한 원천적 주체가 누구인가.
노동조합의 주인은 정부가 아니라 조합원인 노동자들이다. 사적인 조직 내부의 문제들은 주인들이 스스로 자정 해가야 할 문제이고 위법 부당한 행위가 드러나면 여론전이 아닌 법에 맡기면 된다. 법치를 외치는 정부가 나서 내부 회계처리를 들여다보겠다는 식으로 압박하면 고질적인 힘의 논리 속에 갈등의 악순환만을 야기할 뿐이다.
죽이는 법이 아닌 살리는 법이 진정한 법치다
법 운영은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반문 자체가 법을 잘못 이해한 거다. 법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작용해야 하지만, 동등한 잣대를 들이대려면 그런 법아래서 살아갈 개인들 생존기반들이 우선 충족되어야 한다. 즉 국가가 기본적 삶의 조건들을 챙겨야 한다는 전제다. 법은 집단을 통제하는 권력이기 전에 그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수준을 정하고 합의해 낸 산물이자 제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태어난 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법을 목적의 위치로 올려놓는 순간, 군림하는 권력이 되고 인간은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그런 법원(法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법을 다룬다면 그저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와 다를 바 없다.
생존의 외침을 외면하는 사회는 더 큰 사회적 비용과 부담에 직면하게 된다. 모든 사회적 문제들을 대화와 타협 대신 오직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정부에게 이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자는 주문이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까 걱정이다. 결혼을 거부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소극적이되 강력한 이 저항들에 대해선 어떤 법을 들이대고 싶은 걸까. 지금의 장발장은 더 이상 혹독한 대가의 빵이 아닌 정당한 생존권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