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하지 못한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지속 성장하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AI(인공지능) 전환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지난해 7월 19일, 서울 잠실 롯데호텔월드에서 열린 ‘2024 하반기 VCM(옛 사장단회의)’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비장했다. 그는 “강력한 실행력을 보여달라”며 AI를 통한 본원적 경쟁력 강화를 주문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2025년의 마지막 날, 신 회장이 받아든 성적표는 처참하다. ‘AI 혁신’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롯데그룹은 창사 이래 가장 혹독한 ‘인력 감축’과 ‘사업 철수’라는 성적표를 남겼다.
◇ ‘혁신’이라 쓰고 ‘해고’라 읽는다
신 회장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외칠 때, 직원들은 생존의 기로에 내몰렸다.
특히 그룹의 허리이자 신 회장의 ‘친정’인 롯데케미칼의 위기는 뼈아프다. 신 회장은 1990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상무로 입사하며 한국 롯데에 첫발을 디뎠기에 화학 부문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롯데케미칼은 임원들이 급여의 10~50%를 자진 반납하며 비상 경영에 돌입했고,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한 세븐일레븐(코리아세븐)을 시작으로 롯데호텔앤리조트와 롯데면세점까지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었다.
“60대 이상 임원 절반을 줄여라”는 특명 속에 롯데케미칼에서는 책임급 이상 간부들의 자발적 퇴사가 전년 대비 71%나 급증하며 인재 유출이 가속화됐다.
◇ 700억 쏟아부은 신사업, 2년 만에 ‘공중분해’
신 회장이 미래 먹거리로 낙점하고 직접 챙겼던 신사업들의 몰락은 그룹의 미래마저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롯데지주가 700억 원을 출자해 야심 차게 설립했던 롯데헬스케어는 지난해 말, 설립 2년여 만에 법인 청산과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유일한 서비스였던 플랫폼 ‘캐즐’은 수익성 악화 속에 2024년 12월 31일부로 모든 서비스가 종료됐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던 오너의 주문은, 뚜렷한 전략 없이 뛰어든 문어발식 확장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아들 신유열 전무를 경영 전면에 내세우며 새 성장동력 발굴을 꾀하고 있지만, 기존 사업의 잇단 실패로 승계 작업의 정당성마저 위협받는 모양새다.
◇ ‘지라시’가 현실로?… 신뢰 잃은 경영
지난해 11월 증권가를 강타했던 ‘롯데그룹 유동성 위기설(모라토리엄 선언설)’의 여진은 2025년 내내 그룹을 괴롭혔다. 당시 롯데지주와 케미칼은 “루머는 사실무근”이라며 즉각 공시를 냈지만 시장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실제로 롯데는 부산 센텀시티점 등 알짜 자산 매각 검토와 계열사 인력 감축을 멈추지 않았고, 이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시장의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 직원들은 짐 싸는데… 4개사 대표 겸직하며 ‘연봉 킹’
가장 비판받는 대목은 ‘고통 분담’의 불평등이다. 신 회장은 현재 롯데그룹 회장직과 함께 롯데지주, 롯데케미칼, 롯데쇼핑, 롯데웰푸드 등 핵심 계열사 4곳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그룹이 비상 경영을 선포하고 직원들을 내보내는 와중에도, 그는 다수의 대표이사 직함을 유지하며 ‘연봉 킹’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신 회장은 2023년 177억 1500만 원의 보수를 수령해 재계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비상 경영이 한창이던 2024년 상반기에만 117억 원이 넘는 보수를 챙겼다.
오너의 ‘나홀로 호황’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됐다. 2024년 연간 보수 총액은 200억 원을 넘어섰으며, 구조조정이 정점에 달한 올해(2025년) 상반기에도 신 회장은 100억 원대의 급여를 수령한 것으로 파악된다.
재계와 시민사회에서는 “다른 대기업 총수들이 위기 상황에서 보수 반납이나 무보수 경영을 선택한 것과 대조적으로, 신 회장은 오로지 고액 보수를 유지하며 책임 회피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2025년, 롯데는 AI 혁신 대신 ‘신뢰의 위기’를 맞았다. “생존이 문제”라던 신 회장의 경고는 결국 직원들의 생존권만 위협한 채, 오너의 지갑만은 안전하게 지켜낸 셈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