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외주업체 노동자가 설비에 끼여 숨졌다.
고용노동부가 교섭을 지원하고 장관이 직접 “뜻깊은 계기”라고 평가한 원·하청 산업안전 협약을 맺은 지 38일 만이다.
협약에는 현대제철이 하청 비정규직 불법파견 논란 속에 사내 협력사 직원을 직접 고용하려고 세운 자회사 4곳만 참여했고, 숨진 노동자는 그 울타리 밖 외주업체 엠텍 소속이었다. 노조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진짜 책임자”로 지목하며 책임을 촉구하고 있다.
23일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과 고용노동부, 현대제철 반기보고서 등에 따르면 지난 18일 오전 10시40분께 충남 당진시 송악읍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외주업체 엠텍 소속 40대 노동자가 슬래그(철강 찌꺼기) 처리 부대설비 공사 중 설비에 끼였다. 그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노조 설명에 따르면 당시 드럼 내부에는 용접 작업을 위해 노동자 2명이 들어가 있었고, 숨진 노동자는 용접 지원 업무를 맡고 있었다. 노조는 작업 중 드럼이 갑자기 회전하면서 사고가 났다고 밝혔다. 노조는 엠텍 현장소장의 증언을 근거로 사고 전날 드럼 회전을 막는 레버 블록이 해체됐고 사고 당일까지 그 상태가 유지됐다고 주장했다. 숨진 노동자는 협력업체가 고용한 일용직으로, 해당 공정에 투입된 지 2주 만에 사고를 당했다. 노동 당국은 설비에 회전 방지용 고정 블록이 설치되지 않아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사고가 난 설비에 작업중지 명령을 내렸다. 경찰은 업무상과실치사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회사는 이번 사고로 사망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의 말씀을 드린다”며 “관계 당국의 조사에 적극 임하고 사고 수습 및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현대제철은 해당 공정의 인력 운용과 안전 관리를 모두 시공사인 협력업체가 맡았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 보도 참고자료에 따르면 사고 38일 전인 지난달 10일 현대제철과 4개 자회사 노사는 당진제철소에서 단체협약 조인식을 열고 ‘2026년 원·하청 교섭 합의서’에 서명했다. 현대제철과 자회사 노사는 자회사 산업안전·보건 관리체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산업안전·보건 수준 향상을 위한 중장기 개선방안(로드맵)을 수립하기로 했다. 노동부는 이 협약을 지난 3월 개정 노동조합법 시행 이후 원·하청 노사가 교섭을 통해 타결한 첫 사례라고 소개했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은 노사 간 실무협의를 지원하고 노사정회의를 주재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당시 “현대제철 사업장이 보다 안전해 질 수 있는 뜻깊은 계기”라고 평가했다.
노동부 자료가 밝힌 협약 당사자 자회사는 현대ITC(당진)·현대IEC(순천)·현대IMC(포항)·현대ISC(인천) 4곳이다. 현대제철 반기보고서는 이 4곳을 각 사업장의 사내 협력사 직원을 직접 고용하기 위해 세운 회사라고 설명한다. 숨진 노동자가 속한 엠텍은 이 4곳에 들지 않는 외주업체다. 협약이 다룬 ‘자회사 노동자’의 울타리 밖에서 사망사고가 난 셈이다.

노조가 문제 삼는 것도 이 지점이다. 금속노조는 21일 오전 9시30분 그 협약 교섭을 지원했던 고용노동부 천안지청 앞에서 ‘현대제철 하청노동자 중대재해 규탄 금속노조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조는 “한 명이라도 안전에서 배제된 사업장은 안전한 사업장이 아니다”며 “현대제철은 모든 외주, 하청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있다”고 밝혔다. 노조는 현대제철 외주·협력업체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 안전보건관리체계를 마련하고, 노동부가 개선방안의 수립과 이행을 관리·감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작업중지 해제에 앞서 원·하청 현장 노동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내놨다.

노조는 책임의 끝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두고 있다. 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는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 회장의 책임을 촉구했다. 지회가 제공한 현대차그룹 본사 앞 피켓 시위 사진에는 “진짜 책임자는 정의선이다! 하청업체 뒤에 숨지 마라!”, “정의선의 성과 뒤에는 하청노동자의 피땀이 있다!”라고 적힌 손팻말이 담겼다. 사고는 당진에서 났지만, 하청업체와 자회사를 거쳐 그룹 정점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대제철 반기보고서를 보면 노조가 왜 양재동으로 갔는지가 드러난다. 현대제철 최대주주는 지분 17.27%를 가진 기아다. 현대자동차(6.87%)와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11.81%) 등 특수관계인을 합친 지분은 35.96%다. 기아의 최대주주는 현대자동차이고, 현대자동차의 대표이사가 정의선 회장이다. 정 회장의 현대자동차 지분은 2.73%이며, 현대자동차의 최대주주는 현대모비스(22.36%)다. 정 회장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현대차그룹 동일인(총수)이다.
정 회장은 현대제철과 무관한 인물도 아니다. 그는 2012년 현대제철 부회장을 겸임하며 이사회에 들어가 8년간 사내이사를 지냈고, 2020년 3월 정기주주총회를 앞두고 임기를 1년 넘게 남긴 채 사내이사에서 물러났다. 회사는 당시 정 회장이 자동차 사업에 집중하고 현대제철은 전문경영인 중심으로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그로부터 1년10개월 뒤인 2022년 1월 시행됐다.
현재 정 회장은 현대제철에서 아무런 직함도 지분도 없다. 반기보고서의 현대제철 임원 명단과 특수관계인 주주 명단에 정 회장의 이름은 없다. 중대재해처벌법상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지는 경영책임자는 사업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사람으로, 현대제철에서는 올해 1월 1일 취임한 이보룡 대표이사가 이 자리에 있다. 그룹의 지배력은 정 회장에게 모여 있지만, 법이 묻는 책임은 현대제철 대표이사에게 걸려 있는 구조다. 노조가 “진짜 책임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 간극 때문이다.

노조가 정 회장을 겨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는 지난해 8월 27일 협력업체 소속 조합원 1892명 명의로 정 회장과 서강현 당시 현대제철 대표이사, 안동일 전 대표이사를 파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노조는 고소장에서 정 회장을 “현대제철 등에서 파견법을 위반해 수차례의 위법행위를 지휘하는 자”로 규정했고, “진짜 사장은 정의선”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 고소 사건의 검찰 처분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현대제철 개인 최대주주는 정몽구 명예회장이다. 2014년 7월 현대제철 당진·순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정몽구 회장이 책임져라”를 내걸고 공동 전면파업을 선포했다. 12년이 지나 노조가 책임을 묻는 대상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뀌었다.
사망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노조는 이번 사고를 포함해 2022년부터 올해까지 현대제철에서 중대재해로 숨진 노동자가 7명이라고 밝혔다. 2022년 3월 당진 1냉연공장 도금공정에서 50대 직원이 도금 포트에 빠져 숨졌고, 같은 달 예산공장에서는 하청노동자가 철골 구조물에 깔려 숨졌다. 2023년 12월 당진에서 하청노동자가 추락해 숨졌고, 2024년 2월 인천공장에서는 외주업체 노동자가 폐기물 처리 수조를 청소하다 숨졌다. 2024년 12월 당진에서 가스 배관을 점검하던 노동자가, 2025년 3월 포항공장에서 20대 계약직 노동자가 슬래그 포트로 떨어져 숨졌다. 이번 사고도 슬래그 처리 설비에서 났다.
처벌은 가벼웠다. 현대제철 반기보고서 제재현황에 따르면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올해 1월 ‘대형제강 전기로 중대재해 발생에 따른 노동부 일반감독’에서 드러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현대제철 법인과 전 포항공장장에게 각각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대전지법 서산지원은 4월 ‘LDG 누출 중대재해 발생에 따른 노동부 수시감독’과 관련해 법인과 현 대표이사에게 각각 벌금 7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중대재해 2건 뒤 이어진 노동부 감독에서 회사가 낸 벌금은 모두 800만원이다.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처벌받은 기록은 없다. 고용노동부는 2022년 11월 현대제철 법인과 당시 대표를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현대제철이 공시한 최근 처벌은 모두 산업안전보건법·근로기준법 위반 등에 따른 벌금 약식명령뿐이다.
현대제철은 두 차례 벌금을 낸 뒤 ‘위반 사항에 대한 개선조치 완료’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반년 뒤 당진제철소에서 또 한 명이 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