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노동의 가치를 바로 세울 때다
1509년 로마, 몸을 뒤틀고 목을 길게 뺀 기괴한 자세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리고 있는 미켈란젤로는 유쾌하지 않았다. 물감이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고역을 참아가면서 그는 말한다. “이 덫에 갇혀 있는 동안 갑상선종이 악화되었네. 몸 앞쪽 피부는 팽팽하게 늘어나는 느낌인데, 뒤쪽은 구겨지고 접혔어. 나는 지금 시리아 활처럼 휘어 있다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나는 화가도 아니라고.”(열정 절벽, 미야 토쿠미츠)
위대한 작품과 위력적 건물도 인간 노동의 집약일 뿐
5백여 년 전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예배당 천장화 역시 하나의 작품이기 이전에 한 인간의 노동의 산물이었음이 실감나는 장면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화려하고도 거대한 성당 건축물에 압도된 채 감탄사만을 연발했던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장엄한 아름다움이 당시 교회와 지배층의 도전할 수 없는 권위였음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캄보디아 고대 왕국의 자취인 앙코르와트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날의 건축물은 어떤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이라는 삼성, 강남역에 위치한 삼성 사옥 앞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테지만 거대하고 위압적 모습에 압도되면서 삼성의 위력에 새삼 기가 눌리곤 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감탄하곤 한다. ‘역시 삼성의 위력은 대단해!’
그 건축물들 앞에서 당시 왕과 교황의 권위를, 오늘날 자본의 위력을 느끼곤 하지만 물리학적으로 건축물의 축조 과정을 해부해보면 다름 아닌 인간들 노동의 집약일 뿐이다. 당시의 왕조가 한 것이라면 전국의 노동력을 한 곳에 불러들였던 것이었고, 오늘날 수많은 노동자들을 한 곳에 불러들일 거대 자본의 위력이 있었다는 것일 뿐이다.
오직 건축물을 완성한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인간의 노동력이었던 것이다. ‘건물에 들어가는 그 비싼 재료는 자본이 공급했다고?’ 그 비싼 재료를 만들어낸 것도, 심지어 자연에서 채취해 낸 원료 역시 100% 노동의 산물이다.
삼성 사옥의 위력을 새삼 일깨워주기라도 하는 듯 삼성전자의 영업실적은 분기마다 신문의 중요한 기사거리가 되곤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 기업이자 세계적인 순위로도 한국인임을 우쭐해지게 하는 삼성그룹, 경제신문 등 주요 일간지들은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올해 기업들 경영실적이 전반적으로 저조했지만 반도체 실적이 이를 떠받들고 있어 참 다행이라고.”
그런데 삼성 반도체의 경영실적이 발표될 때마다 뜬금없이 심청이의 인당수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마어마한 경영실적이 가리키는 그래프의 높이만큼이나 각종 암으로 사망하고 있는 반도체 산업의 젊은 직원들 숫자가 대비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른거리는 인당수와 함께 꽃다운 젊은 여성들이 채 피기도 전에 암과 사투하며 스러져가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삼성 반도체의 영업실적 뒤에 해마다 이들의 생명이 담보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에 순응하는 사람들, 생존을 위해 강요된 노동
태초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원시적 자급자족 형태의 수렵채취를 끝내고 경작을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의 노동은 지배계층에게, 그리고 자본에게 예속되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노동을 지휘하는 자본은 노동의 질을 평가하고, 그들이 평가한 가치만큼 꼼꼼하게 차등해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내고 있는 끝없는 화려함에 늘 경탄하고 있지만, 그 화려함 뒤에서는 혹독하게 평가된 수많은 노동력이 희생되고 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해마다 위험천만한 일을 수행하는 데 위험수당과 노동자의 목숨이 거래되기도 한다. 이런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시장 환경이 어린 청소년들에겐 예외가 될까. 아니다. 오히려 어리고 힘이 없기 때문에 더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19세 청년의 죽음을 부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신체가 잘려나가고 폭행과 초과근로 등 고교 실습생들이 겪는 비참한 노동현장 앞에서 우리 사회는 서로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며 전가하기에만 바쁘다.
이 사회의 거대한 톱니바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비참한 현실 뒤에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숨어있는 자본과 그 자본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다음 생애는 공부 잘할게요. 미안해요.’라며 마지막 남긴 휴대폰 문자를 끝으로 세상을 등진 어느 청년 실업자가 그랬듯이, 많은 젊은이들은 원인도 모른 채 여전히 이 매서운 현실 앞에 그저 죄인처럼 움츠러들 뿐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배려도 거부당한 채 그들이 제일 처음 배운 것은 ‘자기반성’이었고, 그 노동시장의 대열에도 끼지 못한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의 삶이 항상 안락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잘 안다.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모험의 역사이기도 했으니까. 새로운 삶을 개척해가기 위해 끝없이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왔고, 그 결과 풍요롭고 편리한 오늘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 위험이 자기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또는 이 사회가 만들어 낸 불평등 구조 속에서 강요된 것이라면 어떨까? 그 마저도 선택의 여지없이 오직 생존을 위해 강요된 위험이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늬만 자유, 무늬만 민주사회일 뿐 신분제 사회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고민하게 한다.
노동의 역사를 돌아보자. 수렵채취 시기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이어 신분제 사회에서는 주인을 위해 노동했고 그들의 목숨은 그 주인의 것이었다. 자본주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다시 자본을 위한 노동이 시작되었다. 물론 노동의 대가가 주어졌고, 그 대가를 기반으로 한 때 행복을 꿈꾸기도 했지만 갈수록 생산물 분배의 추가 자본으로 기울어지는 만큼 자본의 노동에 대한 통제력도 커지게 되었다. 꿈꾸던 행복은 말 그대로 꿈이 되었을 뿐, 오직 살기 위해 일하는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소득 분배율의 급격한 감소는 노동 가치의 왜곡이다
부의 불평등은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고 일자리도 부족해졌다. 그것도 아주 극심하게 재편 되었으며 한국은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꿈의 세계를 예고하는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의 사회가 일자리 부족으로 허덕이는 인간을 향해 노동의 경쟁력까지 위협하게 될 것이라며 생존을 걱정하고 있는 현실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기술 혁명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우리에겐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사회를 위해 우리나라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2017 아시아미래포럼에서 ILO 전 부총재인 샌드라 폴라스키가 이에 대해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1970년부터 2014년까지 노동소득 분배율이 심하게 감소해 왔는데, 이런 현상은 임시직·시간제 등 불안정 고용, 실질임금의 감소, 악화된 노동시장 제도들, 사회보장 적용 범위의 격차 등과 같은 주요 채널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노동소득 분배율의 감소가 가장 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한국의 경우, 최근 수십 년간 그 어떤 선진국보다 더 큰 생산성 증가율과 임금 상승률 간의 격차를 경험해 왔다고 말한다. 1995년에서 2013년까지 생산성 증가율은 평균 4% 이상이었지만 실질적 보상(임금 및 복리후생)은 연간 2.3% 증가에 그쳤으며, 증가한 생산성만큼 임금 수준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상승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즉, 그 차이만큼 노동소득 분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음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아래 그림 참조).
그러면서 ‘일의 미래’에 대한 출발점은 ‘일의 현재’가 제공한다며 현재 직면한 이런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내일의 노동시장과 사회보장 제도 역시 현재의 불평등, 불안정 및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불균형 위에 세워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녀가 말하는 ‘일의 미래’에 대한 출발점이 될 ‘일의 현재’는 이 사회에서 인간의 위치(즉 노동력의 가치 평가)를 의미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런 불평등 구조(즉, 노동 가치의 왜곡)가 개선되지 않은 채 기본소득이 시행된다면 인간의 노동력은 무엇으로 평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노동의 지위가 불안정한 기반 위의 각종 지원책은 언제든 쉽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시설을 소유한 자본 권력에 이어 도래할 사회는 그야말로 알고리즘을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 AI를 소유한 자본가들이 시스템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일을 하지 않고도 일정한 소득을 지속적으로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사회를 예고하는 시스템 하에서 부족한 일자리마저 급속하게 잠식당할 것이 우려되는 시급한 상황 하에서의 기본소득 논의이지만, 본래의 취지를 놓쳐서도 훼손되어서도 안 되는 이유이다. 이런 정책들이 한낱 구휼의 의미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인간에게서 노동은 삶의 필연적인 조건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은 삶의 필연적인 조건이자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노동하며 삶을 살아갈 기본적 권리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다. 그런데 이 사회 시스템은 자의든 타의든 그런 권리를 박탈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2017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 행사에서 사회자와 열띤 토론을 벌였던 연사 ‘소피아’는 사우디 정부로부터 세계 최초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인공지능이다.
올해 처음으로 여성에게 운전할 권리를 부여할 정도로 여성의 인권 수준이 낮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인간이 아닌 기계에 시민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현재’가 철저히 무시된 채 ‘미래’로 건너뛰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가 두려워하는 다가올 기술 혁명의 예측 불가능성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는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이후에야 문제점들을 규제하고 관련 법령을 정비하기에 바빴다.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되어온 사람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칫 중심과 본질을 놓치기 쉬운 복잡한 환경에서 부를 분배하고 행복을 나누는 방식의 중요성을 되새겨야 한다. 그 분배와 행복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누려야 할 당연하고도 고유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자신의 군주가 「권력」을 누린다는 사실에 불평하지 않고, 다만 군주의 「폭정」에 불평할 뿐이다.’라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을 새겨야 할 지금이 아닐까? 우리가 만든 제도, 현실 자체에서 오는 근본 문제임에도 우리는 말단의 작은 가지가 흔들리고 있음을 탓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