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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권 전문지

“금융산업의 미생未生 ‘2차 정규직’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할까?”

ㄱ은행에서 일하는 A씨의 공식 직급은 ‘행원B’다. 이 은행의 신입 행원들은 ‘행원A’와 ‘행원B’로 나눠져 있다. A씨는 완전한 정규직인 ‘행원A’가 일종의 무기계약직인 ‘행원B’보다 임금 등 근로조건은 물론이고 승진에 있어서도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온 다음에야 알게 됐다.

여전히 ‘행원B’에 머물러 있는 A씨는 언젠가 ‘행원A’가 될 날을 꿈꾸며 7년째 일하고 있지만 언제 기회가 돌아올지 기약은 없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공부문에서 추진되고 있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을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으로 숨죽여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A씨와 같은 은행 무기계약직들이다.

중규직, 반정규직, 준정규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은행별로도 L0(국민은행), RS직(신한은행), 별정직(NH농협은행) 등 모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지만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비정규직은 아니지만 정규직에 편입되지 못한, ‘2차 정규직’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금융산업 2차 정규직 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회가 7일 오후 국회에서 열렸다.

금융노조와 더불어민주당 이용득·한정애 의원, 국민의당 김삼화 의원,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공동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와 금융노조가 2차 정규직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바탕으로 2차 정규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 현실에서 겪는 차별 등의 문제,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등이 심도 깊게 논의됐다.

발제를 맡은 이종선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부소장은 2차 정규직의 개념을 “명목상 정규직으로 범주화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임금, 승진 및 노동조건 등에서 일반 정규직과의 차별적 대우로 정규직 노동시장에 온전히 편입하지 못한 채 고립·주변화되어 별도의 직군으로 고착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노동자”로 정의하고, 이들 대부분이 여성 노동자라는 점에 주목했다. “1990년대 초 사라진 여은행원 제도의 ‘귀환’이자 젠더 차별적이고 분절적인 노동시장 시스템의 부활과 지속”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올해 8월 21일을 기준으로 신한은행, 우리은행, SC제일은행, KEB하나은행, KB국민은행, 산업은행, 기업은행, NH농협은행, 수협은행 등 9개 국책·시중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2차 정규직 3,6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컸다. 먼저 2차 정규직이 여행원 제도의 부활이라는 연구진의 지적은 과대포장이 아니었다. 전체 2차 정규직 중에서 각 은행별 2차 정규직 수에 비례해 조사 대상자를 선정했는데 무려 91.6%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차별은 근무지와 근무부서에 있어서도 발견됐다. 2차 정규직들은 대부분 영업점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본점에서 일하는 비율은 산업은행(59%)과 SC제일은행(32.7%)을 제외하면 모두 20% 미만이었다. 신한은행은 단 0.6%뿐이다. 근무부서(창구)도 마찬가지였다.

2차 정규직들은 VIP 창구와 외환·기업금융 등 비교적 전문성이 크다고 간주되는 부서에서 일하는 비율은 매우 낮았고 대부분 입출금창구·빠른창구 등의 단순 텔러 업무에 배치돼 있었다.

가장 중요한 근로조건인 임금에서도 박탈감은 컸다. 2차 정규직의 대략 절반가량이 3,500∼4,500만원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는데, 임금수준에 만족한다는 응답은 18.6%에 불과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임금차별에 있었다. “같은 일을 함에도 임금차별이 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50.4%에 달했다. 은행 특성상 정규직과 2차 정규직의 업무가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한데도 ‘출신 성분’에 따라 임금차별이 발생하는 데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다.

쌓여가는 차별에 대한 불만은 직장생활 만족도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임금수준(79.6%), 인사제도(77.3%), 노동강도(72.9%)에서 만족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직장생활 평가에서도 공정한 승진(75.4%), 적절한 인력충원(75.2%), 직무범위 준수(70.9%), 공정한 인사평가(68.3%) 등 대부분 차별에서 비롯되는 인사 문제에 불만이 집중됐다.

구체적으로 현재 승진제도에 만족한다는 응답자는 11.1%에 그쳤고, 합당한 급여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은 17.5%, 현재 직무에 만족한다는 답변은 26.9%에 불과했다. 이들은 상급자의 직급 간 인식(71.4%)과 동료의 직급 간 인식(69.6%)에서 차별과 불이익의 경험을 가장 크게 느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차별에도 불구하고 입사 당시 은행의 직급이나 직급에 따른 임금 및 직무 차이를 인지한 응답자는 대체로 절반 수준(50.2%∼58.4%)에 머물렀다.

2차 정규직 문제가 외부로 공론화되지 않고 조직 내부의 ‘공공연한 비밀’ 수준의 문제로 치부돼 온 탓에 취업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이 극대화된 결과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은행 노동시장의 기존 참여자인 노사가 2차 정규직 문제 해결에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이종선 부소장은 2차 정규직 문제는 장기적으로 ‘차별 없는 완전한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근본적 해법이라고 봤다. 또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해 임금격차 및 차별을 해소하고, 크게 별도직군, 하위직급 두 가지 방식으로 고착화된 2차 정규직들을 각각의 특성에 맞게 정규직으로 전환할 통로를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이러한 개선을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와 산별교섭 차원의 해결책 모색이 중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구진으로 참여했던 홍성태 고려대 노동대학원 연구교수는 두 번째 발제를 통해 2차 정규직의 형성과정과 특징을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했다.

그에 따르면 2차 정규직은 20년 전 IMF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확대된 사용자들의 고용 유연화 시도에 따른 산물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113,994명에 달했던 정규직 규모는 1999년에는 74,744명으로 대폭 줄어들고 15,043명이었던 비정규직은 20,796명으로 늘었다.

이런 경향성은 갈수록 확대돼 2000년 책임관리직을 빼고 33,353명이었던 정규직 행원 수는 2008년 25,596명으로 35% 줄고 같은 기간 비정규직은 18,306명에서 28,776명으로 53% 증가했다.

홍성태 교수는 외환위기 후 부실대출 감축 등으로 은행의 자산 건전성이 제고됨에 따라 2001년 은행권 당기순이익이 5조 2241억원에 달할 정도로 뚜렷한 회복세를 보였음에도 비정규직이 지속적으로 확대됐다는 점을 들어, “당시 인력감축이 단순히 외환위기 조기탈출과 경영정상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금융산업 고용 유연화를 위한 포석이었다는 뜻이다.

특히 그는 2007년 기간제법의 시행이 2차 정규직을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봤다. 기간제법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사용자들은 이를 회피하기 위해 고용전략의 제도적 다변화를 추구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무기계약직, 분리직군, 하위직군 등 세분화된 고용관계가 제도화되면서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양분되었던 기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다중구조로 전환됐다. ‘2차 정규직’의 탄생이다.

은행들은 각각 ▲하위직급 신설 ▲분리직군 신설 ▲단순 무기계약직 전환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눠 고용전략을 세분화했다. 6개 시중은행과 4개 특수은행을 분석한 결과 이렇게 만들어진 2차 정규직은 각 은행별로 최대 33%에 달했고 평균 15.5%, 총 18,019명의 2차 정규직이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2차 정규직이 ‘현대판 여행원 제도’라는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적게는 67%(NH농협은행), 많게는 96.4%(신한은행)가 여성인 탓이다.

홍성태 교수는 “은행산업 내 2차 정규직 여성비율은 90.9%로 압도적 다수이며 계약직 여성비율도 50.9%”라며 “여성노동자들의 젠더 불평등은 여행원 제도에서 비정규직으로, 다시 2차 정규직으로 형태와 이름만 바꿔서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산업 고용관계의 다변화로 차별적 노동시장 구조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제도화의 탈을 쓴 합법적 차별이 여성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별은 임금수준에서 극명히 확인된다. 대리·행원급 정규직 대비 2차 정규직의 임금수준은 연평균 1천만원(우리은행)에서 3천만원(신한은행)까지 차이가 난다.

외환위기 후 은행들의 임금체계는 기존의 연공형 호봉제에 집단실적 성과급을 더한 형태로 변천해왔지만 이마저도 2차 정규직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에 있어서도 상당수 은행들은 정규직과 동일한 혜택을 적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차별을 두고 있는 은행도 많다.

홍성태 교수는 “2007년 기간제법 시행 이후 은행권에서 추진해온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실질적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여성노동의 주변화와 차별화 관행을 재구조화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2차 정규직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기존 차별구조와 다른 더 세련된 형태의 차별적 노동시장에 위치해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직종과 비교해 은행업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 대체적으로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노동의 가치는 단지 임금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노동시장 내의 수많은 차별적 요소들을 단순히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 보상하는 방식은 노동자들을 더 많은 차별의 그늘에 묵종하도록 길들인다”고 비판했다.

그는 “2차 정규직의 차별 문제를 두고 배부른 이들의 투정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노동사회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하향평준화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차별은 본질적으로 관계의 문제이며 우리는 정당한 관계에서만 차별을 객관적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을 줄이고 불가피한 차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공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협력적 관계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토론자로 참여한 최우미 금융노조 여성위원장은 “2015∼2016년 사이 5대 은행의 2차 정규직 신규 채용 인원 중 여성 비율이 88.3%”라며 “2차 정규직의 본질은 ‘하위 직군의 여성화’”라고 짚었다.

그는 “‘여성 지원자가 많아서 많이 뽑았다’는 해명도 있던데 이는 명백히 ‘차별에 대한 변명’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2차 정규직 문제는 과거의 고용관행과 현재의 채용 성비 불균형이 결합한 결과라는 것이다. 최우미 여성위원장은 “은행이 고용한 여성 10명 중 3∼4명은 2차 정규직”이라며 “여성들이 처우와 승진 가능성이 가장 낮은 직군에 집중되고 고임금 고위직을 남성이 독식하는 구조”라고 강조했다.

또 “처우나 승진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은행의 5대5 고용 성비는 일종의 ‘착시’”라고 비판했다. 차별의 제도화라는 지적이다.

승진 차별 문제도 심각하다고 봤다. 그는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지난 국정감사에서 지적한 기업은행을 예로 들었다.

10년 이상 일해도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다시 신입 행원 대우를 받는 현실에서 2차 정규직의 관리자급 승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신한은행·우리은행·KEB하나은행·KB국민은행·기업은행 등 5개 은행들 모두 지점장급의 여성 비율이 10%를 넘지 못하는데 2차 정규직은 약 90%가 여성인 점을 지적하며 “이게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 차별인가”라고 되물었다.

나기수 금융노조 기업은행지부 위원장은 기업은행에서 2차 정규직이 형성된 배경과 현황을 설명하고 노조 차원에서 진행 중인 정규직화 노력을 소개했다. 기업은행에는 약 3,300명의 ‘준정규직’들이 정규직의 약 75%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업무범위는 개인금융 및 수신 위주로 제한돼 있고 관리자급 승진도 불가능하다. 그는 “매년 준정규직의 약 3%인 100여명이 시험을 통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데 그 이상의 인원이 준정규직으로 신규채용된다”면서 “오히려 2차 정규직이 확대되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나기수 위원장은 “기업은행지부는 2차 정규직의 단순한 처우 개선은 결국 신분 계급을 고착화하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차별 없는 완전한 정규직 일괄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정적 문제는 ‘기존 정규직 및 과거 정규직 전환자’와 ‘정규직 전환 대상자’로 나눠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존 정규직들을 대상으로는 일괄 전환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전환 대상자들을 대상으로는 급여 감소 및 경력 초기화의 문제에 관한 대안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놓고 사회 곳곳에서 갈등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20여년간 누적돼온 비정규직 문제의 양태는 그 시간만큼이나 복잡해졌고 ‘공정한’ 해법의 기준도 각자 처한 입장의 가짓수만큼이나 많아졌다.

2007년 기간제법 시행 초기에 시작된 금융권의 무기계약직 전환도 당시에는 합리적 해법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주류였다.

이날 허권 금융노조 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금융산업 내부 격차 문제는 수십년간 이어진 노사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노동운동이 책임져야 할 몫은 매우 크다”면서 “지금의 우리 사회가 우리의 바람과 많이 동떨어진 사회가 되었다면 과거의 결정들을 하나하나 곱씹고 개선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차별을 지양하고 공생의 길을 모색해온 노동운동의 목표가 우리 안에서부터 바로 서도록 해야 한다”는 노조의 문제의식이 해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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