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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권 전문지

2023,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윤호창(복지국가소사이어티 상임이사)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대작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행복은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만 가질 수 있지만, 모든 조건 중에 하나만 없어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온전한 행복은 가지기 힘들다는 이야기지만, 불완전한 현실속에서 행복을 만들어가자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GDP성장을 만물의 척도로 생각한다. 자연환경이 파괴되도, 이웃들의 공동체적 관계가 망가져도, 행복의 증진과는 상관이 없어도 GDP성장이 이뤄지면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GDP성장론이 많은 문제를 낳았기에 행복의 관점에서 정치경제, 사회문화를 다시 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2023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어제와 다름없는 해이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맺음을 잘해야 제대로 된 성장을 할 수 있다. 2023년 대한민국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침체하는 경제, 솟구치는 물가, 다양한 사회갈등과 불안한 세계 정세 그리 우호적인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다양한 사회갈등을 조정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의 본래 역할이지만, 길을 잃은 정치는 미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정치가 국민을 걱정해야 하지만, 오히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전도된 시대를 산 지 오래되었다.

눈 떠 보니 ‘선진국’과 ‘후진국’ 

문재인 정부에서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했다. 해방 이후에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했고,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제3세계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유일한 국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코로나19 초기에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력과 참여로 서구 유럽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와서 ‘눈 떠 보니 후진국’이란 말이 나왔다. 이태원 참사를 두고 한 말이다. 인구 천만의 대도시에서 158명이 선 채로 압사를 당한 믿기 힘든 현실 때문이다. 더군더나 참사 이후의 처리 과정을 보면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이다. 진실은 오리무중이고, 책임지는 이들은 없고, 갈등의 언어는 난무하고, 가족을 잃은 이들의 가슴만 타들어간다.

눈 떠 보니 ‘선진국’이니 ‘후진국’이나 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불안정성을 대표하는 말들이다. 외국 대학에서 ‘한국학’이 자리잡기 힘들다고 농담처럼 한다. 학문은 정체성과 예측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 사회는 좀처럼 정체성을 찾기 힘들고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역동성이 강한 사회다.

지난 한 세대만 돌이켜보자. 식민지·전쟁·분단을 경험했지만 87년 민주화를 성취하고,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우리 사회는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97년 국가부도의 위기를 맞이했고, 외국에서는 대한민국이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할 것으로 진단했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통해 비교적 단시간에 국가부도의 위기를 외형적으로 극복했고,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수정부에 권력은 넘어갔고, 다시 전세계에서 유례를 보기 힘든 시민들의 무혈혁명을 통해 정권을 바꾸었다. 하지만 5년만에 다시 보수정권으로 권력이 넘어갔다.

좋게 말하면 역동성이지만,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에게는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불안한 삶터일 뿐이다. IMF위기는 외형적으로 극복했지만, 이후의 한국 사회를 규정짓는 것은 불안사회라는 점이다. IMF 이후 불안은 우리 사회의 정서적 특징이 되었고, 현재와 미래의 불안은 20년 넘게 한국 사회를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 국가로 만들었다.

불행한 국민, 불안한 미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까닭은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경제적 빈곤, 낮은 자아존중감, 공동체의 해체가 이에 해당한다. 양극화가 심한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취약 계층이 의지할 만한 사회안전망은 취약하며, 약육강식의 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는 대부분의 개인들에게 자존감을 키워줄 여유를 주지 않는다. 더군더나 믿고 의지할 만한 공동체마저 거의 깨어져 작은 시련에도 개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린다. IMF 이전의 대한민국 자살율은 OECD 평균과 비슷했지만, IMF 이후로는 2~2.5배에 달한다. 높았을 때는 평균의 3배도 넘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출산율로 나타난다. 22년도의 출산율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사상 최저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1.0 미만의 출산율은 인류사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우리 사회는 5년째 연속해서 기록하고 있다. 급속한 출산율 저하로 2020년의 경제인구와 비경제인구의 비율이 대략 5:1이었다면 30년에는 4:1, 40년에는 3:1 정점에 치닫는 6~70년 경에는 비경제인구가 경제인구를 넘어설 전망이다. 이런 사회가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불평등과 이로 인한 불안의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문제는 산적해 있다. 기후위기는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현재의 재난이다. 점점 빈발해지는 폭염, 폭우, 폭한, 전염병의 세계적인 등장 등등. 산업혁명과 오염을 통해 기후위기의 큰 원인을 제공한 서구 선진국이 먼저 책임을 통감하며 정의로운 전환의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만 그들의 성찰과 양보는 보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물가는 치솟고 있으며, 미중의 패권갈등으로 인한 한반도의 위기 또한 심화되고 있다. 지난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면, 시장쟁탈을 위해 전쟁의 역사와 동반해왔다. 긴장이 높아진 세계에서 전쟁의 불똥이 어디로 튈 지는 알 수 없다.

왜 문제는 개선되지 않을까?

지구환경부터 이웃공동체의 해체까지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세계의 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점점 악화되고 있다. 근대체제, 근대세계의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근대의 시작과 함께 정치에서는 엘리트 중심의 대의민주주의가 시작됐다. 대대손손 특권이 세습되는 전근대의 신분제 사회보다는 진일보했지만, 대의민주주의는 곧바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근대의 사회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영국식 대의제가 가지는 맹점을 이렇게 일갈했다.

“영국 국민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자유로운 건 의원을 선출할 때 뿐이며, 일단 선출이 끝나면 그들의 노예가 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인을 뽑는다는 말과 동의어가 됐다. 하지만 주권자의 의지를 배신하는 대의정치는 근대의 역사를 통해 좌파든, 우파든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근대정치는 사회계약의 철학에서 출발했고, 사회계약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할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를 비롯한 근대 국가들의 총체적인 위기를 보면서 이 전제가 잘못된 가설임을 점점 확인할 수 있다.

정치후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의제 중심의 선진 국가들도 심각한 민주주의와 사회적 위기를 겪고 있다. 영미처럼 대의제의 전통이 강하면 강할수록 위기의 징후도 강하다. 시민들의 직접 참여가 활성화되어 있는 북유럽 복지국가들과 직접민주주의의 강한 전통이 있는 스위스 정도에서 그마나 안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북유럽 5개국과 스위스는 지난 2012년부터 UN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의 세계 행복국가 조사에서 1번도 10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 한국 사회가 20년 가까이 ‘세계 최고의 자살율 국가, 최저의 출산율 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대의정치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왜곡된 정치에서 비롯한다고 봐야 한다.

2023년 희망과 행복,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2016~7년 1700만명의 촛불시민이 만든 민주화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세계 민주화운동에서 드물게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교체했지만, 여전히 미완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퇴행하는 기득권 권력에 분노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에서 보는 것처럼, 어쩌면 대의된 권력에게 뭔가 새로운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헛된 희망일지도 모른다.

2023년. 시민들이 행복을 원하다면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바람직해 보인다. 보다 다양해진 시민들의 욕구와 기대를 반영해 다양한 정당들이 등장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이웃들과 뜻을 모아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지역정당을 통해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로 보인다. 이미 오랜 기간 경험해왔지만,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바꾸지 않으면 ‘최고의 자살율, 최저의 출산율 국가’라는 집단자살사회의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19세기 법학자 예링의 표현을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치적 권리위에 잠자는 이들에게 행복은 기대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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