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자동차세 개편 발표 1년 반… 한미 FTA·트럼프 변수에 ‘멈춤’
행정안전부가 자동차세 과세 기준을 배기량에서 차량가액으로 개편하는 방안에 대해 “아직도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개편 추진 계획을 발표한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서, 사실상 개편 작업이 보류 상태에 접어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18일 행안부 관계자는 뉴스필드와의 통화에서 “(한·미 FTA)협상 가능성이 있을지, 필요할지, 다른 대안은 없을지 등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며 “자동차세 개편 추진단은 그대로 유지돼 있지만, 인력은 많이 줄어든 상태다. 대외적인 여건상 세수가 크게 늘어나는 게 아닌 이상 지금 시점에서 추진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 2023년 발표한 개편안…실제 시행 불투명
앞서 행안부는 2023년 9월, 배기량을 기준으로 한 자동차세 부과 방식이 기술 변화와 시장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라 과세 기준을 차량가액으로 전환하는 개편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비영업용 차량의 경우 배기량 1000cc 이하는 cc당 80원, 1600cc 이하는 140원, 1600cc 초과는 200원의 세율이 적용된다. 영업용 차량은 배기량 1600cc 이하는 18원, 2500cc 이하는 19원, 2500cc 초과는 24원이 부과된다.
그러나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는 엔진 다운사이징(Downsizing) 기술 발달로 배기량은 줄이되 출력은 유지하는 차량이 늘어나며, 기존 과세 기준이 실효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여기에 배기량 자체가 없는 전기차가 보급 확대되면서 배기량 중심 과세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대통령실은 2023년 8월 국민참여토론을 거쳐 차량가액을 기준으로 하는 자동차세 개편 권고안을 마련해 행안부에 제시했다. 행안부는 이 권고안에 따라 2024년 하반기를 목표로 새로운 과세 기준을 입법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최근 상황은 계획과 달리 정체 국면에 빠져 있다.
◆ 한미 FTA ‘족쇄’에 트럼프 통상 압박까지
자동차세 개편 논의가 지지부진해진 배경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미 FTA 제2.12조 3항에는 “대한민국은 차종 간 세율 차이를 확대하기 위해 배기량에 기초한 새로운 조세를 도입하거나 기존 조세를 수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과세 기준 변경이 협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실제로 행안부는 2010년 이산화탄소 배출량 및 연비 기준 과세 도입을 추진했으나 한미 FTA와 충돌하며 무산된 바 있다. 2015년에도 차량가액 기준 과세로 전환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최근에도 유사한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부터 자동차 분야에 대해 관세뿐 아니라 부가가치세(VAT)와 환경 규제 등 비관세 장벽까지 문제 삼으며 무역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미국 백악관은 “관세 외에도 상대국의 세금, 보조금, 규제 등을 반영해 상호 관세 세율을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에도 “상대국들이 미국에 막대한 세금을 물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유럽연합(EU) 등 주요 교역국의 부가가치세(평균 20%)와 미국 주별 매출세(평균 5%)의 격차를 ‘무역 불공정 요소’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한국산 완성차에도 추가 부담이 생길 경우, 미국 수출 비중이 높은 현대차·기아 등 국내 완성차 업계는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다.
◆ “지금 시점 맞나”…개편 사실상 ‘보류’
이처럼 한미 FTA라는 법적 장벽과 미국의 통상 압박이 맞물리며, 행안부는 자동차세 개편 추진 동력을 잃고 있다. 세수 증대 효과도 크지 않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한다. 개편 이후 세수 중립 기조를 유지한다는 방침이어서, 정부 입장에서는 ‘힘들게 개편했는데 세수가 그대로’인 상황을 감내할 이유가 적다는 분석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세수가 크게 느는 게 아니라면 지금 시점에 개편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추진단이 유지되고 있지만 인력이 줄어든 상황도 사실상 개편 작업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 대안 모색할까…향후 전망은
다만 행안부는 “다른 대안은 없을지 검토하겠다”고 밝혀, 차량가액 기준 전환 외에도 새로운 과세 체계를 모색할 가능성을 열어뒀다. 일각에서는 차량 에너지 소비효율이나 탄소 배출량 등 친환경 요소를 반영한 과세 체계가 대안으로 거론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부 교수는 “배기량 기준은 전기차 확대와 다운사이징 추세 속에서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면서도 “한미 FTA 문제와 미국 통상 압박 등 변수가 많아, 정부가 서두르기보다는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동차세 개편은 명분과 필요성은 충분하지만, 국내외 복합적인 여건에 가로막혀 당분간 ‘제자리걸음’을 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