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건설산업의 생산성과 지속가능성을 인간안보 문제 해결의 핵심으로 제시했으나, 회사는 팔레스타인 주택 철거에 자사 장비가 사용됐다는 인권단체 질의에 답변하지 않았다.
현대 굴착기가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도로·정착거점 공사에도 사용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해외 판매 장비에 대한 인권실사의 실효성이 쟁점이다.
2일 기업인권센터(BHRC)의 공개 기록에 따르면, 센터는 최근 HD현대에 팔레스타인 주택 철거에 자사 장비가 사용됐다는 의혹을 질의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센터는 이 같은 내용을 10월 30일 공개했다. 미국 건설장비 업체 캐터필러도 같은 질의에 답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2023년 10월 26일 CES 주최기관인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가 공개한 발표문에서 건설산업의 생산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인류가 직면한 인간안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HD현대 사장이던 정 회장이 디지털 트윈과 스마트 건설 솔루션 등 건설산업 혁신 비전을 설명하며 밝힌 내용이다.
이번 질의의 바탕은 지난해 5월 보도된 철거 사건이다. BHRC는 AP통신의 당시 보도 영상에 현대와 캐터필러 장비가 등장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AP는 지난해 5월 5일 서안지구 남부 할레트 알다브 마을에서 주택 9채와 천막 5개, 가축 우리 5개가 철거됐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군정기구는 당시 군사훈련을 위한 폐쇄구역에 불법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철거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민들은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당국의 건축 허가를 받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호소했다.
장비 사용 문제는 이전에도 제기됐다. 앰네스티는 지난해 3월 사진과 영상 347건을 검증한 조사에서 2019년 9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현대 장비로 철거된 팔레스타인 소유 주택·상점 등 구조물 59개를 확인했으며, 약 250명이 강제로 이주했다고 발표했다.
국제앰네스티가 올해 6월 10일 공개한 서안지구 베두인·목축 공동체 조사보고서에는 별개의 현대 굴착기 사용 사례가 나온다. 보고서는 지난해 7월 28일 정착민들이 움알케이르 마을 인근에서 현대 굴착기로 새 도로와 이동식 건축물을 설치하기 위한 토목작업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앰네스티는 공사를 마친 굴착기가 주민 소유 올리브밭을 통과하려다 주민들과 충돌했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이 진로를 막고 적어도 한 명이 장비 앞유리에 돌을 던졌으며, 굴착기의 해머가 주민 한 명의 머리를 쳐 쓰러뜨렸다고 적었다.
앰네스티는 이후 같은 현장에서 정착민 이논 레비가 권총을 발사해 팔레스타인 인권활동가이자 교사인 아우다 알하탈린이 숨졌다고 보고했다. 이스라엘 인권단체 브첼렘의 갱신된 기록과 AP 보도에 따르면 레비는 올해 8월 이 사건으로 기소됐으며, 레비 측은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앰네스티는 공사 이후 현장 변화도 추적했다. 올해 1월 30일 위성사진에서 이동식 건축물로 보이는 구조물들과 새로 포장된 연결도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HD현대 측은 과거 장비 사용 의혹에 관여를 부인했다. 앰네스티가 공개한 답변에 따르면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지난해 3월 25일 해당 분쟁지역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앞서 2024년에는 현지 판매업체 기록을 검토한 결과 이스라엘 철거 업무 등 정부기관에 판매한 기록이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 인권실사 확대 약속…공개된 평가는 국내 사업장 대상
HD현대 건설기계 사업은 올해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를 합친 HD건설기계로 통합됐다. 현재 대표이사는 문재영 사장이다. 6월 말 공시 기준 최대주주는 지분 35.89%를 가진 HD현대사이트솔루션이며, 이 회사 지분은 HD현대가 전부 보유한다.
지주사 HD현대의 최대주주는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다. 10월 2일 공시 기준 정 이사장 지분은 23.05%, 아들인 정기선 HD현대 회장 지분은 9.67%다. 정 회장은 HD현대사이트솔루션 대표이사도 맡고 있다.
HD건설기계는 올해 발간한 2025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인권경영 감독 체계를 설명했다. 유명희 이사가 위원장인 이사회 산하 ESG위원회가 주요 정책을 심의하고, 인권경영위원회가 개선과제 선정과 이행 점검을 맡는 구조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ESG위원회는 지난해 7월 인권경영 정책과 추진계획을 승인했다.
HD건설기계는 문재영 대표 명의의 홈페이지 인권경영 선언에서 사업 운영 지역의 인권 위험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부정적 영향을 시정하며 그 결과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공개된 지난해 인권영향평가는 국내 사업장을 대상으로 했다. 회사는 367개 지표로 평가해 1000점 만점에 888점을 받았으며, 개선과제 72건을 도출했다고 설명했다. 주요 과제에는 지역주민 인권보호를 위한 협의 지침과 정책 수립, 계약 갱신 때 인권보호를 평가하는 절차 마련 등이 포함됐다.
해외 실사는 확대 계획으로 제시했다. 회사는 2030년까지 전 세계 사업장의 인권실사를 완료하고, 국내 사업장은 2년, 해외 사업장은 3년 주기로 현장평가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해외 주요 생산법인부터 평가한 뒤 판매법인으로 넓히는 방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