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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권 전문지

코로나19 위기 핑계로 나타나는 장애인 인권

이동석(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만나고 싶은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수업도 학교가 아닌 집에서 컴퓨터만 쳐다보면서 해야 하고, 취미생활도 자제해야 하고, 어울려서 즐겁게 술을 먹고 싶어도 문을 연 술집이 없고, 술을 먹어도 눈치 보면서 먹어야 한다. 누구 하나 코로나19 이전의 삶과 똑같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이래저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장애인 등 특정 계층만 더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든 국민이 비슷한 수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그러다 보니 9월 7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모든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보편적으로 주자는 주장이 45.3% 정도로 나타났다. 1차 재난지원금 지급 당시인 3월 31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보편적 지급에 대한 찬성이 37.1%였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보편적 지급에 대한 찬성이 더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국민 대다수가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렇기에 보편적 지원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모든 국민이 비슷한 수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우리나라 언론뿐만 아니라 뉴욕 타임즈와 같은 미국 언론도 코로나19가 계층 격차를 더 심화시키고 있고, 일종의 ‘코로나19 카스트 제도’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자들의 경우 안전지역에 있는 호화로운 별장에서 격리 생활을 맘껏 누릴 수 있다. 또 온라인으로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자기 집에서 안전하게 온라인으로 업무를 보면서 수입의 손실이 없이 살 수 있다.

이와 달리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직종의 저소득 노동자들은 감염 위험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출근해 위의 계층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새벽 배송을 해야 하는 ‘쿠팡맨’의 돌연사나 구로 콜센터의 집단 감염은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김종성, 2020). 더 나아가 아동, 장애인, 노인, 사회복지시설 생활인, 이주민, 홈리스 등은 이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은재식, 2020). 보호작업장에 나가서 한 달 동안 단돈 몇 만 원이라도 벌던 발달장애인들은 장애인복지관이 휴관함에 따라 그마저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 위험은 공평하지 않았고, 방역 정책에 따른 삶은 더욱 불공평했고, 기존의 사회적 약자들이 더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코로나 블루’보다 더 암담한 ‘코로나 블랙’

이에 따라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가 개최한 『코로나 19 상황에서 장애인 인권 상황과 대책 마련을 위한 제언』 토론회에서 당사자 사례를 발표한 한 장애인은 당시 상황을 외부 활동을 못함에 따라 나타나는 우울 증상인 코로나 블루(corona blue)가 아니라, 모든 것이 암담해진 코로나 블랙(Corona black)이라고 정의하였다.

“정부와 지자체는 정례브리핑과 관련 지침을 통해 감염 현황과 예방 정보를 알렸지만 장애인의 의사소통 방식을 고려한 정보는 전무하였으며, 마스크 수급 안정화 대책에 장애인은 배제하였다. 수용시설에 대해 아무런 대책 없이 예방적 코호트 격리라는 말만 반복하며 장애인에 대한 감염 관리를 포기하였다. 일상적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함께 자가격리에 들어갔고, 24시간 밀착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도 마찬가지였다. 방역 및 생활에 필요한 물품 지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확진 장애인이 발생하였으나 입원 가능 병실이 없다는 이유로 집에서 자가격리할 것을 통보했을 뿐이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책이 없어서 가족이 모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Corona Blue가 아니라 장애인에게는 Corona Black이었다.” (출처: 이민호. 2020. “당사자 사례발표 1”.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코로나 19 상황에서 장애인 인권 상황과 대책 마련을 위한 제언』)

코로나19로 인한 피해 자체도 불공평했지만 방역 정책에 의한 피해도 불공평했다. 방역을 한다고 하는데, 오히려 장애인들은 그로 인해 더 많은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생활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은 코호트 격리라는 명분 아래 더욱 더 고립되고 격리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배제된 채 살던 사람들이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아예 지역사회와의 실낱같은 연결망도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일본 크루즈 선에서 코로나가 발병했을 때 일본 정부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승객들의 하선을 막으면서 오히려 감염을 키웠던 상황에 대해, 우리 언론과 국민은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다른 나라 국민에 대한 코호트 격리에 대해서는 분개하면서 오히려 우리나라 국민에 대한 집단 차단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잖아”로 일관했다. 과연 코호트 격리가 시설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었는지, 그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정부는 자가격리자에게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면서 방역용품과 생필품을 담은 생존키트를 제공했다. 대면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하니, 생존키트를 자가격리자의 집 문 앞에 놓고 갔다. 그런데 문밖에 놓인 생필품을 안으로 들여오지 못하거나, 안으로 들여왔다고 해도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다면, 자가격리는 ‘죽음으로 가는 길’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한 장애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언급했다.

“코로나19 음성 판정이 나왔고, 11일간의 완벽한 고립이 끝났다. 온 몸이 마비됐고, 왼팔 하나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나는 활동지원사의 도움 없이 처음으로 2주를 보냈다. 처음 보낸 2주, 내가 중증장애인임을 다시 증명해야 하는 시험 같았다. 나는 버려지듯 혼자가 돼야만 했다. 왼팔에만 의지한 채 온 집안을 기어 다녔다.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배가 고파서 보급품으로 받은 박스를 열어 보았다. 들어 있는 건 생쌀과 배추, 그 외 라면과 부식들,.. 몸에 물만 적시는 샤워, 쌓여만 가는 쓰레기, 악취… 11일간의 자가격리는 지옥이었다.”(출처: 국민일보 이슈 & 탐사 중증장애인 왼팔로만 버틴 11일의 자가격리. 2020.4.6.)

방역 핑계와 사회권 보장의 백지 상태

방역 정책 중에 장애인이 피해를 입은 사례는 너무나 많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보편적 전염병 방지 정책의 기획 및 집행 과정에서 장애인이나 노인 등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계층에 대한 세심한 주의와 배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유의 사태라서, 경황이 없어서 등의 여러 핑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더불어 사는 사회, 개인의 존엄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국민도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정책적 배려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취약한 사람들에게 기본권을 통제하는 방식의 위기관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방역을 핑계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권 보장을 백지 상태로 쉽게 돌리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00구청에는 입구가 세 군데이다. 중앙 입구에는 계단만 있고 양쪽 옆의 입구로는 계단과 경사로가 있다. 평소에는 세 개의 입구를 모두 개방했으니, 장애인이 중앙으로 출입을 못해서 그렇지 출입 자체가 안 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발열 체크 등 방역 검사를 위해 양 옆의 문은 폐쇄하고 가운데 입구만 개방했다. 이렇게 되면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 계단 이동이 어려운 사람들은 구청 진입이 아예 봉쇄되는 것이다. 아마도 장애인 등의 일부가 손해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한 것 같다. 편의시설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던 1990년대로 회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도서관의 경우, 평소에 장애인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되었다. 시각장애인 점자 표시도 1층 엘리베이터가 있는 입구로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런데 방역을 이유로 1층 입구는 폐쇄하고 반대편 쪽 계단을 30개 정도 올라가야 들어갈 수 있는 2층 입구만 개방했다. 더구나 목발을 사용하는 장애인이 1층 입구에서 문이 폐쇄되어 있어 어디로 가야 하냐고 직원들에게 물어보자 “건물을 돌아가서 계단으로 올라가라”고 태연하게 말하기도 했다. 장애인의 출입을 원천봉쇄한 것이고, 장애인 등 이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굳이 이 시국에 도서관을 이용할 필요가 있냐는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위기나 응급 상황에서 장애인, 노인 등 일부 계층의 존엄성은 뭉개져도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인간에 대한 존중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소외됨 없이 정책, 피해가 많은 사람부터 우선 지원해야!

우리는 종종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이 정책의 기본방향인 것처럼 말을 할 때도 있다. 국민 중의 최대다수가 최대로 행복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정책일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은 이와 같은 생각에 의해 국민 전체의 방역을 위해 일부의 손해와 피해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손해나 피해의 대상이라면 어떨까?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내가 희생을 당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일까? 그리고 다수가 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존엄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모든 국민이 각자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은 존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나는 조금 존엄하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기나 응급 상황이라는 이유로 장애인, 노인, 외국인 노동자 등 소위 힘이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아니라, 누구 하나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마련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그런데 소외됨 없이 정책을 세심하게 마련하고 추진한다고 해도 누군가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후 대책은 피해가 많은 사람부터 우선 지원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긴급재난지원금 대상 논쟁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장애인이든 아니든, 누구 하나 코로나19로 인해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에 따라 보편적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주는 것도 바람직할 수 있다. 피해의 격차가 크지 않았던 재난의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더 바람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동안 피해가 누적되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그 피해는 기존에 가난했던 사람에게, 장애인에게, 외국인 노동자에게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보다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이 더 정의로울 것이다. 진보나 보수와 상관없이 정치는 국민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없어져서 고통 받는 국민이 사라지는 날을 기원하지만, 코로나19가 없어진다고 해도 지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들은 계속 힘들 수 있다. 이에 우리 사회가 함께 지혜를 모아 보다 힘들어하는 국민들을 어우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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