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인상 논란, 문제는 인상률이 아니다
올해 최저임금 인상률 16.4%는 그간의 인상률에 견주어 다소 파격적이었다. 일부 신문들은 급격한 인상으로 인해 우리 경제가, 고용구조가 걱정이라며 연일 비판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근근이 살아가는 상당수 저임금 근로자들에게 내린 모처럼의 단비라 반겼는데, 그게 아니었던가보다. 많은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게 생겼고 영세 제조업자들이 불가피하게 직원들을 해고할 수밖에 없어 결국 고용은 줄고 또 다른 실업으로 근로자들의 고통이 예상된다고 걱정한다.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생존에 필요한 최저 생계비
그렇다면 이번 최저임금 인상은 정말 잘못된 결정이었을까? ‘최저임금법’은 제1조(목적)에서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 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근로자의 생계안정을 위해 일정 수준의 임금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953년 제정된「근로기준법」에 최저임금제의 실시 근거를 두었으나,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 최저임금제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실제 운용하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산업화 바람과 함께 산업 현장 근로자들도 늘어갔던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임금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최저임금법으로 이를 보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였다(법 제정은 1986년 12월).
최저임금에서 한 발 더 나아가 2012년부터는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자체 고용한 근로자들의 생활을 좀 더 향상시키겠다는 취지로 ‘생활임금’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다수의 지자체들이 이런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해마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나름의 최저임금 수준을 심의하지만 여전히 ‘근로자의 생활 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생활임금’은 임금 근로자가 실질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법정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로 최저선의 생계비인 최저임금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즉 ‘생활임금’은 근로자들 주거비, 교육비, 문화비 등에 대한 종합적 고려 하에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 수준임을 표방한다. 1994년 미국 볼티모어시에서 관련 조례가 제정되면서 시작됐다.
최저임금 외에 생활임금제도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이유는 최저임금제도가 그 취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생활임금에 못 미치는 일반 사업장의 최저임금 근로자들은 어떻게 보호해야 할까.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눈부신 21세기에 살고 있는 그들의 임금은 여전히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준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있다. 분명 고육지책이 아닌 실질적 수준의 보장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실질적 임금 현실화를 방해하고 있는 장애요인들이다. 게다가 이게 너무 고착화되어 있기까지 하다.
최저임금 현실화를 방해하는 요인들
최저임금 인상에 민감한 사업군은 대부분 영세상공인 또는 영세제조업들이다. 이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민감한 것은 당연하다. 임금인상분에 4대 사회보험, 퇴직금 등 비급여 인상분도 사업주의 부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영세사업장의 현실을 고려해 최저임금 인상을 자제해야만 할까? 그러자니 이건 최저생계비에 미달하는 임금 생활 근로자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보편적 복지의 기반이 취약한 우리나라 현실이선 더 그렇다. 과연 이 딜레마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노동소득 분배율의 하락과 소득 불평등의 심화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전인 1995년 우리나라 상위 10% 소득집중도는 29.2%로 당시 미국(40.5%), 일본(34%), 영국(38.5%), 뉴질랜드(32.6%) 등 대부분 국가보다 낮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인 2012년 한국의 상위 10% 소득집중도는 44.9%까지 치솟으며 33개 주요 국가 가운데 미국(47.8%)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아졌다.
상위기업 집중도 역시 IMF 외환위기 이후 더욱 높아졌다.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는 오바마 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제이슨 퍼먼의 2015년 발표 논문을 근거로 1997년 이후 미국의 많은 산업들에서 집중도가 높아졌고, 수익률 상위 10% 기업들의 수익률이 크게 높아져 기업들 사이의 격차가 커지면서 기업 차원의 경쟁 약화가 불평등 심화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이런 내용은 한국에 그대로 가져와도 잘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한국도 상위 3개 기업의 점유율인 품목 시장 집중도가 2005년 59%에서 2013년 약 68%로 높아졌다고 한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집중도는 국제적으로도 높고 집중도의 심화가 노동소득 분배율 하락의 중요 요인이라고 한다. 또한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은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 행위의 기반이 되며, 우리도 어떤 기업에서 일하느냐가 소득과 불평등을 좌우한다고 말한다.(한겨레신문 2018년 1월 29일자)
외환위기 이후 노동소득 분배율 하락의 원인인 상위기업 집중도와 시장 지배력 강화가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 행위를 유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들은 오늘날 서민들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우리 국민은 고통 분담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많은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 속에서 경제위기를 이겨내는 동안에도 대기업들은 인원 감축, 인건비 동결을 통해 호황기보다 더 배불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줄어만 가는 일자리에 경쟁력 강화 체제로 소득 불평등 구조도 심화시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실업으로 내몰린 많은 노동자들이 택한 유일한 일자리는 바로 비자발적 자영업이었다.
그럼에도 다수의 신문들은 연일 이런 근본 문제는 외면한 채 최저임금 인상이 과도했다며 정부를 때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 정책으로 인해 영세상공인(을)과 또 다른 (을)인 근로자 모두가 힘들게 되었다며 은근히 ‘을’들 간의 갈등도 부추긴다. 이들 언론은 정말 문제의 근원을 몰라서 그랬을까. 지금 저임금 근로자의 임금 수준에 머물고 있는 사업자들은 기업에서 해고되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자영업자들이다. 그들의 골목상권까지 들어와 있는 대형슈퍼, 빵․떡볶이․김밥까지 팔고 있는 대기업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임대료 폭탄, 최저임금을 제대로 맞추기 힘들 정도의 하도급 계약들, 문제의 근원은 바로 이처럼 왜곡된 산업 구조에 있었던 것이 아니던가!
‘을’들 간의 갈등으로 몰아가는 언론, 산업 전반의 구조 개선부터 말해야
산업 구조는 경제 위기를 거치는 동안 더욱 왜곡됐다. 이런 왜곡이 제조원가 또는 서비스 단가 구성 항목 중의 하나인 임금 수준을, 즉 노동소득 분배율을 하락시켜 왔다. 골목상권 규제, 원·하도급 관계 개선, 임대로 인상 규제, 이 정도만 해결되어도 영세상공인들 문제는 한층 개선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근본 문제는 외면한 채 일부 신문들은 연일 최저임금 인상 때리기에, 사회적 약자인 영세자영업자와 최저임금 근로자 사이를 이간질하고 이들 간의 갈등 부추기에 바쁘다. 그들이 보기에 그렇게도 우리 경제가 걱정이라면 지표가 말해주듯이 당장 골목상권 회복을 촉구해야 하고, 원·하도급 관계에서 도급액의 적정수준 회복(즉, 하청회사 근로자의 임금이 제대로 반영될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한 달 장사의 상당 부분을 임대료에 바쳐야 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올라가는 임대료 정책부터 개선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대기업,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단계 하도급 관계에서 하방으로 내려갈수록 단가를 후려치는 관행을 개선하라고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도 신문들은 영세상공인들을 걱정하는 척하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그래서 이들 언론의 최저임금 때리기 논조는 가진 자들의 ‘부’를 더욱 확대해 나가야 하는데 최저임금 인상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메시지로 들릴 뿐이다.
예상되는 문제와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신중히 준비했어야 할 정부 정책에도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산업 전반에 걸친 구조 문제에 관한 한 일거에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산업 구조의 정상화를 기다린 후에야 최저임금 정상화를 추진하기엔 보통사람들의 실질적 소득 격감으로 인한 생계 기반의 악화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따라서 ‘투 트랙의 정상화’가 필요하다. 결국, 한쪽으로는 최저임금의 현실화를, 다른 한쪽으로는 공정 거래를 중심으로 한 산업 구조의 개선을 병행하면서 가야 한다.
2018년도 최저임금은 이미 실시되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었고 모두가 만족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최저임금이 이미 적용되고 실시된 마당에 그 보완책이 아닌 ‘대안 없는 갈등’만 부추기는 일부 언론의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불평등 구조의 진짜 ‘갑’이 전면에 나서 문제를 해결해야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원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저임금 제도는 고용 정책이 아니라 임금 정책이며 설령 고용에 일부 부정적 효과를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건 별도의 고용 정책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고용 정책과 임금 정책의 구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고용이 감소하게 될 테니 임금 수준의 정상화(최저임금 현실화)를 멈추라는 일부 신문들의 주장에 선을 그은 것이다.
모 종편 뉴스의 앵커는 이렇게 말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영세기업 사업장은 심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업장들은 근로자를 재고용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최저임금보다 적은 임금으로도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죠.” 참으로 위험천만하고도 무지스런 이런 멘트를 듣고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으로 일하고자 원하는 근로자와 근로계약을 하면 그만이라고? 강행 법규인 최저임금법을 무시해도 된다니, 정작 그들은 ‘을’들 간의 갈등으로 또 한 번 싸움을 붙이자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제품에 문제가 생겨 A/S를 신청했다가 회사의 대리인인 상담원이나 A/S 직원에게 큰 소리로 항의할 수 없었던 경험들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할 그 회사의 진정한 의사 결정권자는 볼 수 없고, 오직 매뉴얼대로 답변할 권한만 가진 그들에게 항의해봤자 해결은 요원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인을 대신해 전면에 나선 상담원이나 직원들에게서 느껴지는 무기력감에 ‘내가 조금 양보하고 말지’ 하는 일종의 동정심이나 포기심리일 것이다. ‘갑질’ 고객으로부터 수모를 당하는 ‘갑’의 직원 ‘을’들의 사례가 무수히 많지만 여기 또 다른 사례 하나가 있다.
2014년 7월 미국 언론인 라이언 블록이 컴캐스트에 전화해 케이블 서비스 중단을 요구하면서 벌어진 상담원과의 무의미한 갈등 관계 이야기이다.(미야 도쿠미츠, 열정절벽)
“간단한 일인데도 몇 분이 지나도록 처리되지 않자 화가 난 블록은 고객서비스 담당자와 8분간 통화한 내용을 녹음해 사운드 클라우드에 공유한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같은 말의 반복에 짜증났던 사람들이 많았던지 그 상담원은 곧 인터넷 ‘오늘의 악당’으로 등극했다. 상담원에 대한 반감은 놀라울 정도로 컸다. 익히 알고 있듯이 고객서비스의 실제 목적이 단지 서비스 자체만은 아니다. 당연히 이들의 수입은 정기적 급여가 아닌 팁이나 수수료 등 건당 인센티브이다. 고객의 서비스 취소를 막거나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하면 상담원에게 금전적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상담원의 업무용 컴퓨터에는 대화를 효과적으로 늦출 수 있는 질문 리스트와 형식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이 들어 있다. 온갖 방법으로 감시와 통제를 받는 상태에서 컴캐스트 상담원은 블록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인간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컴캐스트에서 상담원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는 어떤 직원은 “나는 항상 옳은 일을 할 권리를 빼앗겼다고 느꼈다. 회사는 직원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일해야 하는지, 타당한 정책인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른 뒤 블록도 이를 인정했고, 블록을 인터뷰했던 존 허먼은 웹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간결하게 요약해 올렸다고 한다.
“상담원이 블록을 괴롭힌 것도 아니고 블록이 상담원을 고문한 것도 아니다. 컴캐스트라는 조직이 두 사람을 학대했을 뿐이다.”
자본가는 그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저임금의 감정노동자, 그리고 생산 근로자와 소비자들을 감시하고 관리할 뿐이다. 그 대가로 그들이 가져가는 돈은 어마어마하며 해마다 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불균형이 심화될수록 최저임금 수준도 갈수록 현실과 괴리되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