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에 ‘각별한 기대’를 거는 이유
일본 아베 정부의 도발적 행위에 대하여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결전의 의기로 대응하고 있다. 그만큼 이 사안이 우리 국가와 국민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다른 한 편에서는 우리와 우리 후손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또 다른 정책 논의가 조용히 진행 중이다. 국민연금 개혁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중요성이 비추어 이 사안이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절대로 소홀하게 취급돼서는 안 되는 국정 현안 중의 하나다.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치열하게 논의하여 최선의 합의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공적연금, 국가중심주의냐 국민중심주의냐?
최근 일본 정부의 경제침탈 행위를 관찰하면서 그들의 행태를 이끄는 정치이념과 우리나라 공적연금의 발전 경로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른바 ‘국가중심주의’다. 아베 정권의 일탈적 행위의 근저에는 국가중심주의가 있다. 이는 다수 대중이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비판 능력을 상실할 때 오는 위험한 현상이다. 전혀 다른 영역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공적연금, 특히 국민연금이 국가중심주의적 동기에서 구상되고 설계되고 도입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냉정하게 그 실체를 깨닫고 위험성을 경고하며 국가중심주의의 함정에서 빠져 나와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논의하고 합의해야 할 이슈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일찍이 국가 주도의 발전을 추구하는 국가의 양면성을 지적하며 국가중심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 사람이 있다. 복지국가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영국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이다. 그는 호전국가(warfare state)에서 힌트를 얻어 복지국가, 즉 ‘welfare state’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에서 벗어나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국민과 이웃나라 국민들에게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국가의 두 얼굴에 주목하였다. 당시의 독일은 국민을 국가 발전의 수단으로 동원하여 강력해진 경제와 군사력으로 이웃국가들을 침탈하곤 했다. 윌리엄 템플은 그런 국가를 호전국가라고 했다. 반대로 국민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힘쓰며 이웃국가들과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국가를 복지국가라고 불렀다. 국가 주도의 발전을 추구해도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국민의 삶에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윌리엄 템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는 복지국가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한 것 같지만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첨언이다. 그는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국가가 복지국가의 외형을 띠면서도 국민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파시즘적 국가중심주의로 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국가중심주의의 반대 개념을 국민중심주의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의 공적연금, 특히 국민연금은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양자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금제도 도입의 목적 설정, 제도나 재정운영 원칙의 설계, 재원조달 방식 등에서 국민의 삶 개선을 우선시 하느냐, 내자동원이나 산업진흥, 경제성장 등을 우선시 하느냐를 보면, 양자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공적연금, 특히 국민연금은 최근까지 국민중심주의적 가치를 추구해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국민의 노후의 삶이 열악하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 이유를 다시 더듬어보자.
첫째, 제도 도입의 동기와 목적 측면에서 국민의 노후빈곤 예방과 적정 노후소득 보장을 최우선시 하지 않았다. 기금의 축적과 유지를 통한 경제 활성화나 정권의 정당성 확보가 암묵적인 최우선의 목적이었다. 둘째, 가입 대상자 선정 시 근로여건이 열악한 직업군을 후순위로 하였고, 제도 도입 당시의 노인 연금권 확보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 초기 가입자들이 연금권 확보가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설계한 우호적 수급 구조는 제도가 성숙할 때까지 상당기간 지속시켰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기부터 급속히 허물었다. 절대적으로 충분한 가입기간을 확보할 수 없는 초기 가입자들에게 적정 노후소득을 보장하려면 보험료에 비해 급여 수준을 높여주는 것은 불가피하다. 충분히 제도가 성숙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서서히 급여 수준을 낮췄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셋째, 제도의 설계와 기금 운영에 대한 국가의 관여 정도에 비추어 그에 상응하는 재정 책임을 지는 데 국가는 인색했다.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를 주요 재원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사회보험연금제도에서 저소득자와 불안정 취업자 등은 국가의 재정 지원이 없으면 보험료를 내지 못하거나 불충분하게 납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가 그들의 자조 노력을 돕거나 최소한의 연금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국가의 적극적 재정 지원이 필요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거나 최대한 기피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국민 대다수를 포괄하는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은 연금기금을 통한 국가경제의 견인과 연금재정의 건실화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온 것이다. 국민의 노후빈곤 예방과 적정 노후소득의 보장이라는 공적연금 본래의 목적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것은 국민중심주의적 가치보다 국가중심주의적 가치를 우선하여 추구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국민연금 도입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노인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 평균 열 분 이상의 노인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이라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사회 현상이 10년 이상 지속되고 있음에도 어느 정당, 어느 정치인, 어느 관료를 막론하고 이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에 ‘각별한 기대’를 거는 이유
다시 한 번 돌아보건대,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국민중심주의적 가치를 추구해 온 ‘국민의 연금’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렇기에 포용적 복지국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에게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여타의 공적연금 개혁의 방향을 명확히 하고, 개혁 목표의 설정이나 개혁 추진의 전략과 방법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개혁의 출발 과정에서 그런 변화의 조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국민연금 개혁의 사회적 논의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길을 잘 간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국가중심주의적 가치에서 벗어나 국민중심주의적 가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근본적 가치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 착안해야 할까?
정책학자 피터 홀(Peter Hall)에 의하면 근본적 정책 변화는 그 정책이 추구하는 ‘목적’과 ‘핵심 원칙’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근본적 정책 변화(fundamental policy change)라고 한다.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과 불확실한 미래를 고려할 때 공적연금은 정책 목적과 전략에서 근본적 대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국민연금 ‘재정 계산의 해’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국민연금 개혁의 사회적 논의는 과거와 같이 ‘얼마를 내고 얼마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수급구조 중심의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적연금이 추구해야 할 최우선 가치와 목적에 대한 치열한 논의와 합의이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어떤 목적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해 왔는가? 공적연금은 노후소득 보장이 본래 목적이다. 재정 안정화는 그 목적을 잘 달성하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2차적 목적이다. 그동안 수단적·이차적 목적이 본래적·일차적 목적을 밀어내고 우선시 되어 오지는 않았는가? 그렇게 추구한 정책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의심도 하고 질문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런 치열한 모습은 현 사회적 논의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목적과 수단의 전도는 효율성과 성과를 앞세우는 정부에서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국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엄중하다. 한두 개의 사례를 들어보자. 어떤 가장이 가족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수단적 목적)으로 평생 돈 버는 데만 열중하고 아내와 자식들과 대화하고 가족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지속적으로 소홀하다고 치자. 그 결과,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이혼에 따른 가족 해체와 자식들의 원망이라는 불행을 맞게 된다. 돈도 결국은 가정의 행복에 도움이 될 때만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 60년 동안 모든 국가 역량을 경제성장에 집중하였다. 일정기간 불균형 발전 전략이 불가피했다 할지라도 어느 시점부터는 적절한 사회정책을 통한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를 간과한 채 모든 자원과 역량을 경제성장에만 투입했다. 정책의 경로의존성에 매몰되어 변화의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국민의 행복지수는 최하위에 머물고 급기야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국가가 추구해야할 목적인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경원시하고 수단적 목표인 경제성장만 추구한 업보이다.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인구의 감소는 삶의 질에 대한 국민의 평가보고서다. 국가중심주의적 경제성장만을 추구한 결과가 결국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그간의 논의와 이후의 절차
우리는 이 전환의 시기에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한다. 국민의 노후빈곤 예방과 안정된 노후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국민연금이다. 그런데 연금기금을 보호하기 위해 안정된 노후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을 언제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노후빈곤 예방과 적정 노후소득의 보장을 이루지 못한 채 달성된 기금의 보호와 연금재정의 안정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동안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 국민의 보편적이고 적정한 공적연금 수급권을 보장하지 못해왔다면, 이제부터라도 그간의 정책 경로를 벗어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현재의 진행 상황을 제대로 점검하고 조율해야 할 시점에 있는 것이다.
작년 8월 국민연금 재정계산 결과와 제도 개선안이 발표되었다. 그 후 발표된 개선안을 중심으로 공청회를 거치고, 지역별·계층별 국민토론회와 여론조사 등을 통해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운영계획)’을 수립하여 12월 국회에 제출했다. 국민연금 개선안을 하나의 정부안으로 만들어 국회에 제출해왔던 예전 정부들과 달리 4개의 개혁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영세자영업자의 연금보험료 지원을 포함한 사각지대 해소 방안도 함께 담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운영계획’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과 별도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국민연금 개혁과 노후소득 보장을 위한 특별위원회(연금특위)’에 사회적 논의를 의뢰하였고, 지금까지 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
지난 4월 말로 6개월의 논의 시한이 끝난 연금특위는 16차례의 토의를 진행하면서 전문가 검토과제를 학습하고 각계의 공식·비공식 의견을 수렴하는 등 각 논의주제별로 개혁안의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논의 자료를 즉시 정리하여 홈페이지에 공유함으로써 누구나 논의의 과정과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6개월이라는 기한은 논의 주제의 방대함과 복잡함, 그리고 이해관계 상충 등의 장벽을 넘어 합의에 이르기에는 부족했다. 연금특위는 논의 기간 3개월 연장을 결정하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본회의에 연장 결정을 요청했으나 다른 안건(탄력근로제)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로 의사정족수가 미달되어 연장되지 못하다가 3개월이 지난 8월 초에야 연장되어 8월말을 기한으로 논의를 정리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