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블레이크와 송파 세 모녀
안동 시내에는 전통 깊은 예술극장이 하나 있다. 구 시가지의 오래된 건물 3층에 위치해 있다. 바로 <안동중앙시네마>가 그곳이다. 요즘 세상에 소규모의 영세 예술극장을 운영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버티면서 의미 있고 예술성 높은 독립영화들을 안동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중요한 곳이다.
그 예술극장의 대표가 한 달쯤 전에 내게 전화를 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상영하는데, 영화를 본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 영화의 내용과 관련된 복지 강연을 극장에서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마침내 날짜가 잡혔다. 6월 2일, 금요일 오후 5시부터 영화 후 곧바로 강연을 하는 일정이었다. 나는 그날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홍보팀장과 함께 안동 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2016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를 수상한 작품이다. 켄 로치 감독은 이 영화에서 영국의 신자유주의가 복지국가를 약화시키고 시장주의를 강화하는 일련의 제도 개혁을 통해 복지 수급의 조건을 까다롭게 함으로써 어떤 비인간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작년 칸영화제에서 100분 동안의 영화 상영 직후 15분 동안이나 관객들의 기립 박수가 계속됐던 것은 바로 이 영화의 이런 탁월성 때문이었다.
영국 뉴캐슬에 사는 59세의 다니엘 블레이크는 40년 동안 성실한 목수로 경제활동을 했었다. 자녀는 없다. 사랑했던 아내는 장기간 정신질환을 앓았고 끝내 사망했다. 그래서 그는 독거노인이다. 그런데 그는 얼마 전 심장 발작으로 의식을 잃고 추락할 뻔했다. 그의 주치의는 심장 박동에 문제가 생겼다며 ‘심장 질환’ 진단을 내리고 약을 복용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면서 한동안은 일을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주치의의 치료와 권고를 충실하게 따랐다. 약을 복용하고 당분간 일을 쉬기로 한 것이다. 쉬는 동안에는 정부의 사회보장기관으로부터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한다. 이런 경우, 질병(상병)수당 제도가 작동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질병수당 신청이 기각된 것이다. 심장에만 다소 문제가 있을 뿐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였다. 이런 경우, 재심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비인도적 관료주의의 벽 때문에 디지털 시대의 컴맹인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재심 청구는 지나치게 복잡했다. 결국 재심 과정은 기약 없이 늘어졌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다니엘 블레이크는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사회보장기관 직원의 조언대로 질병수당 대신 구직수당을 신청해서 당장의 기초생계를 해결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구직수당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찾아다녀야 하고, 이런 사실을 증거자료와 함께 서류로 입증해야 한다. 심장질환으로 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일을 찾아다니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 이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다니엘 블레이크는 결국 구직수당을 포기하고 정공법으로 질병수당 재심에 도전한다. 마침내 재심 날짜가 잡혔고, 주변의 도움으로 재심을 받기 위해 관공서에 도착한다. 그리고 재심을 받기 바로 직전에 바짝 긴장했던 그는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 영화는 1980년 대처리즘 이후 복지국가 노선을 해체하거나 또는 크게 약화시킨 신자유주의 영국 사회에서 이웃을 배려할 줄 알고 정직하게 살아온 보통사람들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제도적으로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이 대사는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의 말이다. 그가 영국 정부의 사회보장기관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페인트로 쓰고, 그 앞에서 농성을 했던 이유이기도 한다. 2016년 11월 29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손원제 기자의 <칸 화제작 러시…예술영화에 풍덩 빠져볼까>에 기술된 다음의 글은 이 영화가 던지는 이면의 메시지를 잘 설명해준다.
“질병수당 심사관은 영국 정부의 하청을 받은 미국 업체 소속이다. 콜 센터도 외주이고, 인터넷 접수 센터 또한 동떨어진 곳에 있다. 민영화와 외주, 분사 등 신자유주의 ‘혁신’의 세례가 공공복지 제도마저 찢어발긴 것이다. 그것의 후과는 가장 먼저 정직하거나 준비 없는 사람을 덮친다. 이 모든 것은 복지 청구를 어렵게 해 비용을 줄이려는,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나쁜 질의 일자리나마 군말 없이 부여잡게 하려는 자본과 정부의 의도적 합작품임을 이 영화는 폭로한다.”
송파 세 모녀의 죽음
2014년 2월 2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엄마 박모(60) 씨와 장녀 김모(35) 씨, 차녀 김모(32)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번개탄을 이용해 세 모녀가 동반 자살했다. 현장에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 집세와 공과금이 밀려 죄송하다는 내용의 메모도 함께 발견됐다.
이 부분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도 자존감을 지키려고 했던 선량하고 정직한 보통사람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OECD 평균의 3배나 되는 자살 공화국 대한민국이지만,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고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비판과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박 씨의 남편은 1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녀는 당뇨와 고혈압에 시달렸고, 만화가를 꿈꾸었던 차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했다. 그런데 두 딸은 신용불량자여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고, 이들 가족의 생계는 식당 일을 하던 엄마 박 씨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박 씨가 한 달 전에 넘어져 오른팔을 다치면서 식당 일을 못하게 됐다. 그때부터 이 집의 소득은 단절됐다.
우리나라는 상대빈곤율이 15%이다. 중위소득 가구 소득의 절반도 안 되는 가구의 비율이 전체의 15%나 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OECD 주요 국가들의 2배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소득의 불평등이 매우 심하다. 소득 상위 10% 계층이 전체 소득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OECD 주요 국가들 중 미국과 함께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다. 이는 우리나라가 다른 복지국가들과 달리 중위소득 가구의 소득이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위소득의 절반도 안 되는 소득을 가진 상대빈곤 가구는 사실상 절대빈곤에 가깝다.
우리나라는 절대빈곤율이 경기 상황에 따라 대개 5-8%의 범위에 있다. 그런데 절대빈곤 가구의 기초생계를 돌보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전체 국민의 3% 정도만을 선별한다. 정부는 이렇게 선별된 빈자들에게 공공부조를 제공한다. 전체 국민의 3%만 이 혜택을 받는다. 이는 절대빈곤자 비율 5-8%에 턱없이 못 미친다. 상대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만 삐끗하면 언제라도 절대빈곤 상태로 내몰릴 개연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선별적 복지의 대상자로 편입돼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스스로 극빈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결국 수치심(stigma)을 감수하는 대가로 정부로부터 최소한의 기초 생계를 보장받는 것이다.
송파 세 모녀가 이런 경우였다. 두 딸은 소득이 없었으므로 엄마 박 씨가 식당 일해서 벌던 월 150만 원 정도가 이 가구의 총 수입이었다. 이 정도의 가구 소득이면 절대빈곤선을 넘나드는 상대빈곤 가구에 속한다. 절대빈곤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긴 했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보통사람들이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만약 송파 세 모녀가 보편주의 복지국가인 북유럽 국가의 국민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빈곤을 이유로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 블레이크의 나라 영국의 국민이었다면 어땠을까. 역시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
다니엘 블레이크와 송파 세 모녀, 두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송파 세 모녀가 자살한 데는 빈곤 이외의 이유도 없지 않을 것이다. 계속되는 빈곤과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정신과적 우울증이나 이에 준하는 정신적 상태에 처했을 개연성도 크다. 그런데 이 부분은 다니엘 블레이크의 상황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영국은 주치의 제도 하에서 국민 누구든지 자신을 잘 아는 주치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니엘 블레이크도 주치의로부터 심장질환을 진단받고 치료와 함께 일을 쉬도록 권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에게 우울증 같은 어떤 정신과적 문제가 있었다면 주치의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영국에 있는 주치의 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먼저, 이게 다르다.
죽음의 원인으로 빈곤에만 초점을 맞춰보자면, 송파 세 모녀의 비극은 엄마 박 씨가 오른팔을 다쳐 식당 일을 못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월 150만 원의 소득이 단절됐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북유럽 국가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나라 영국 국민이었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4대 사회보험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 박 씨가 일하던 식당이 산재보험에 가입해 있었을 것이고, 산재보험의 급여로 평소 받던 임금의 약 80% 정도를 수령했을 것이다.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었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식당들은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목수였고 심장질환자였다. 당장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소득은 단절된 상태다. 이럴 경우, 보통사람들에게 필요한 소득 단절에 대한 제도적 대책이 바로 4대 사회보험이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경우는 목수로 일하면서 산업재해로 인해 심장질환이 발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산재보험의 급여를 받을 수는 없다. 이제 남은 사회보험(또는 사회보장)의 도움으로는 질병보험의 급여(또는 질병수당)나 고용보험의 급여(또는 구직수당)가 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질환으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용보험의 급여(또는 구직수당)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그의 요건에 해당하는 질병수당을 요구했던 것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질병수당 신청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심장마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질병수당을 수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질병수당 제도 자체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송파 세 모녀 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에 있었다. 결국 다니엘 블레이크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절차가 까다롭고 급여가 축소되긴 했지만 보편적 성격의 사회보장 제도가 그나마 존재하는 나라에서 복지 혜택을 받는 과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송파 세 모녀는 미성숙한 복지국가인 대한민국의 광범위한 사회보장 사각지대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자살을 선택했던 것이다.
질병보험 제도 도입: 보편적 소득보장의 사각지대 없애야
4대 사회보험의 하나인 고용보험(실업보험)은 복지국가라면 어디에나 다 있는 ‘보편적 복지’ 제도다. 우리나라도 고용보험이 있지만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자영업자와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지 않다. 자본-임노동 관계에 속해 있는 근로자들도 비정규직이거나 저임금인 경우에는 고용보험 가입률이 매우 낮다. 결국 우리나라는 일하는 사람들 중의 거의 절반이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지 않다. 게다가 가입해 있더라도 소득대체율이 지나치게 낮다. 우리나라 고용보험의 급여는 하루 약 4만3천 원으로 소득대체율이 OECD 최하위 수준이다.
고용보험이 보편주의 원칙을 잘 제도화하고 있었다면 엄마 박 씨의 오른팔 부상으로 인한 문제가 절대빈곤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경우라면 기초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실업급여가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엄마 박 씨가 보편적 복지국가나 우리나라의 대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다쳤다면 당연히 산재보험이 적용됐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의 영세업체나 자영업 종사자들은 산재보험에 가입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엄마 박 씨의 소득 단절과 결과적인 자살은 보편적 복지의 부재 또는 제도적 부실이 불러온 참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의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획기적인 속도로 사각지대를 없애고 급여 수준을 높여야 한다.
고령과 은퇴로 인한 소득 단절의 경우에 적용되는 공적 노령연금인 국민연금과 앞서 언급한 산재보험·고용보험 이외의 소득보장을 위한 사회보험으로는 질병보험이 있다. 그래서 이 네 가지를 소득보장을 위한 4대 사회보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질병으로 인한 소득 단절에 대비하는 질병보험 제도가 아예 없다. 우리나라와 미국을 제외한 OECD의 모든 복지국가들은 질병으로 인한 소득 단절에 대해 제도적으로 잘 대응하고 있다. 영화에서 보았듯이 다니엘 블레이크의 나라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제도적 대응에는 질병급여와 질병수당이 있는데, 약간의 성격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재원이 사회보험인 질병보험 제도를 통해 조달되면 이 경우에는 질병급여라고 부르고, 재원이 조세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으면 질병수당(또는 상병수당, 주로 정액을 지급함)이라고 칭한다.
선진 복지국가들은 어떤 경우든지 소득이 단절될 경우 보편주의 원칙에 충실한 4대 사회보험(또는 사회보장)이 작동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3가지 제도에서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을 결여하고 있고, 한 가지 제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기존 3가지 제도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소득대체율을 높이려는 노력을 가파르게 경주하고, 질병보험 제도의 도입을 정치사회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법 제50조(부가급여)에는 “공단은 이 법에서 정한 요양급여 외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임신·출산 진료비, 약제비, 상병수당, 그 밖의 급여를 시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상병수당은 사문화된 상태이다.
그런데 국민건강보험은 사회서비스에 해당하는 의료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한 보편주의 제도이다. 소득보장 용도로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애초부터 소득보장 제도인 질병보험 또는 상병수당은 프로그램의 성격이 의료서비스보장 제도와 뒤섞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질병으로 인한 소득 단절에 대비하는 소득보장 제도로 별도의 사회보험을 창설하는 방안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국민건강보험료는 의료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한 것인데, 저부담의 건강보험료 수준 때문에 현재 보장성 수준이 63%에 머물고 있다. 건강보험료를 인상해서 보장성을 높여야 하는 큰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질병급여(상병수당)는 건강보험료가 아닌 별도의 재원으로 충당돼야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가 건강보험료가 아닌 별도의 보험료를 추가 징수해서 재원을 마련한 것과 같은 방식을 취하면 된다. 관리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보험자 역할은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당하면 된다. 이렇게 질병보험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 국민들은 노인장기요양보험료와 마찬가지로 건강보험료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매달 질병보험료로 납부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일생에 걸친 보편주의 원칙의 공적 소득보장 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민간보험 방식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래서 미국과 우리나라를 제외한 OECD 대부분의 복지국가들에서 이런 공적 소득보장 제도가 작동하고 있다. “이게 나라냐”는 촛불의 절규에는 틀림없이 이런 내용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