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추구권’만으론 부족하다
나는 복지국가를 주제로 대중 강연을 할 때면 언제나 ‘행복’을 키워드로 삼는다. 그리고 나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82년에 돌아가신 내 할머니의 병명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지난주 목요일 오후, 성남시 분당구에서 열렸던 지구촌사회복지재단 초청 강연에서도 역시 그랬다. 그런 후 나는 “왜 내가 할머니의 병명을 모를까요?”라고 청중들에게 묻는다. 그러면, 곧바로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서 그럴 것”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렇다. 내 할머니는 제대로 된 병원에서 입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던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다 그랬을 것이다.
이하의 글 중 내가 소셜닥터가 된 이유라든지 의료보장 정책에 관한 경험적 내용들은 나의 저서인 <복지국가는 삶이다>(도서출판 밈)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내가 임상의사가 아닌 ‘소셜닥터’가 된 이유
1980년대 중후반쯤, 나는 의과대학 선배들과 함께 빈민지역으로 의료봉사 활동을 다닌 적이 있다. 지금은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변한 노원구 일부 지역이 그곳인데, 당시는 빈민들이 천막집을 짓고 거주했다. 우리 의료봉사단은 한 달에 한두 번 진료를 나갔는데 지역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꽤 있었다. 질병의 대부분은 관절염이나 고혈압,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이었다. 우리는 2주 또는 한 달 분의 약을 나눠주고 돌아오곤 했다. 그때 나는 이런 의료봉사 활동이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내게 많은 번민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들 도시빈민 만성질환자들은 의료봉사단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병원의 체계적인 진료가 필요한 사람들인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지구촌사회복지재단 초청 강연에서 나는 청중들에게 “내 할머니가 돌아가신 1982년쯤 우리나라 인구의 몇 퍼센트 정도가 의료보험증을 가지고 있었을까요?”라고 물어봤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의료보험제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답이 쉽게 나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대충 찍어보라고 권유한다. 청중 속에서 30%쯤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그렇다”고 응답한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인 1977년 7월부터 시작됐다. 500인 이상을 고용하는 대규모 단위 사업장과 공업단지의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조합주의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했다.
1977년 당시 500개가 넘은 직장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었지만 이들 조합들은 단지 310만 명의 인구만을 포괄했다. 이는 당시 전체 인구의 8.8% 정도에 불과했다. 1979년 1월부터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됐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는 300인 이상을 고용하는 사업장에도 의료보험제도가 적용되도록 했다. 직장의료보험조합의 적용대상을 단계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1981년에는 100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도 의료보험제도의 적용대상이 되도록 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업장의 노동자가 아닌 농어촌과 도시의 지역 주민들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다수는 여기에 속해 있었다. 내 할머니의 경우도 의료보험제도가 적용되지 않던 농촌 지역 주민에 해당한다.
의료보장의 사각지대가 넓게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의료보험증이 없던, 사각지대에 있던 보통사람들이 의료이용과 관련해 겪는 차별과 고통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의료기관들은 두 개의 가격 체계를 운영했다. 의료보험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격 체계와 의료보험증이 없는 보통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격 체계가 따로 존재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직접 봤던 사례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은 두 환자가 한 지역 병원의 침상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한 사람은 경찰관의 부인으로 의료보험증이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도시 서민으로 의료보험증이 없었다. 1주일쯤 지나서 의료보험증이 있는 사람은 10만 원 정도를 내고 퇴원했다.
그런데 의료보험증이 없는 사람이 문제였다. 진료비로 150만 원을 요구받았다. 애원과 흥정 끝에 80만 원 정도를 내고 퇴원했다.
의료보험제도는 의료기관이 제공하는 의료행위마다 가격을 매겨 의료비를 적정 수준에서 통제한다.
그런데 의료보험제도 밖에서 이루어지는 의료행위는 시장 가격에 맡겨졌다. 의료기관들은 의료보험제도라는 정부의 통제 밖에서 의료보험증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료보험 수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임의로 책정했던 것이다.
정부도 이런 상황을 계속 방치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1988년 1월 농어촌 지역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됐고, 1989년 7월부터는 도시 지역에도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됐다. 이로써 외형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증을 갖게 됐다.
하지만 400개가 넘은 의료보험조합들 간의 재정 격차가 심각했고, 보장성 수준이 지나치게 저열했다. 조합주의 의료보험제도의 한계가 뚜렷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 7월 달성된 ‘전 국민의료보험제도’로 인해 전반적으로 우리 국민의 의료 접근성이 좋아졌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여전히 필요한 만큼의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의료이용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더 심해졌다.
왜냐하면 의료보험제도가 의료이용의 경제적 장벽을 낮춰 주는데, 이 장벽(본인부담)이 당시처럼 높은 수준으로 설정돼 있으면 중산층까지는 의료이용을 크게 늘리겠지만 저소득층이나 서민들은 여전히 경제적 부담을 느껴 의료이용을 꺼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소득계층 간 의료이용의 격차는 더 커지게 된다. 나는 누구라도 필요한 만큼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한다면 우리 국민들이 보다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할머니는 의료보장의 사각지대에서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돌아가셨다. 노원구 지역의 빈민들은 응당 병원에서 체계적인 진료를 받아야 했음에도 의과대학 의료봉사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의료보장의 사각지대였다. 설사 병원에 입원할 약간의 여유가 있어 병원 치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이중의 가격 체계가 작동해 의료보험증이 없던 보통사람들을 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1989년 7월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됐지만 조합주의 의료보험 방식의 한계로 인해 저소득층과 서민들의 의료이용은 여전히 어려웠다.
조합주의 의료보험제도는 1977년 시작된 이후 12년이라는 역사적으로 짧은 기간에 걸친 거대한 성과를 바탕으로 성공한 제도로서 고착화될 지경이었다. 이미 조합주의의 기득권이 작동했으므로 저절로 개혁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나는 병원 진료실에서 환자를 잘 진료하는 의사도 좋지만, 아예 병원에 오지 못하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병원에 올 수 있도록 의료보장제도를 잘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한 시기라는 판단을 했다.
보통사람들도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강권 개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제도 개혁이 요구됐다.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의과대학 졸업자들 중에서는 이런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 일은 임상의사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가 이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시민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임상의사(메디컬 닥터) 대신 사회의사(소셜 닥터)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 기간 내내 나는 건강권에 집착했고, 그것의 기초가 되는 보편적 의료보장제도를 쟁취하기 위한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그 운동의 성과가 지금의 ‘국민건강보험제도’이다.
‘건강권’만으론 행복이 보장되지 않아
1990년대 10년 동안, 우리나라 ‘건강권’ 운동은 거대한 성과를 일궈냈다. 조합주의 의료보험제도를 국가가 운영하는 하나의 공적보험자로 통합일원화하자는 ‘의료보험 통합운동’이 국민적 지지 속에 정치적 외연을 확대해 나가다가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본격적인 입법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2000년 7월 지금의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창설됐다.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수백 개의 의료보험조합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사회연대의 범위가 조합 단위에서 전국적 단위로 넓어졌다. 관리운영의 효율성 제고뿐만 아니라 건강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는 사실이다(50%에서 시작해 참여정부 말기 65%까지).
나는 이 일련의 건강권 운동 과정에서 적극적 참여자 또는 주역 중의 한 명이었다. 나는 이런 시민운동뿐만 아니라 전문가적 참여의 과정을 통해 내가 사회의사(소셜닥터)로서 소명을 다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일을 계속 하도록 하는 데 동력이 돼 주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연구자문위원과 연구원장(3년)으로 4년 동안 있으면서 ‘암부터 무상의료’ 등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높이는 일을 했다. 지금의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도 내가 건강보험연구원장으로 있을 때 제도화된 것이다. 만약 이런 정책 기조가 보수정부 10년 동안에도 계속 되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OECD 평균 수준에 가까울 만큼 보장성 수준이 높아져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 임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건강권’만으론 보통사람들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의과대학 졸업 후 곧바로 건강을 주제로 시민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줄곧 15년 넘게 그렇게 시민운동을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 사회의 전반적 행복 수준은 크게 추락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시각은 복지 전반과 경제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총체적 발전 방향으로 확장됐다.
그런 고민과 성찰의 결과가 바로 ‘복지국가’였다. 그리고 당시 뜻을 같이 했던 전문가들과 함께 2007년 7월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출범(사단법인 등록은 10월 말)시켰다. 그때 출간된 <복지국가 혁명>이라는 책은 당시 우리의 인식과 지향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을 통해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정치사회적 공론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행복추구권’을 넘어 복지국가로
우리 사회에 문제가 생긴 건 1997년 외환위기 이후였다.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IMF가 요구했던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수용했고, 이후 빠른 속도로 제도화됐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큰 시장과 역할이 작은 정부가 탄생했다. 지난 20년 동안의 일이다.
그 기간 동안 심화된 경제와 산업의 양극화는 결국 일자리의 양극화로 귀결됐다. 보편적 복지의 제도화를 실질적으로 추진하는 것 대신에 선별적 복지로 땜질식 문제 해결을 추구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복지를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 극빈자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소득 불평등이 심각한 격차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난 20년 동안 헌법상의 권리인 ‘행복추구권(헌법 제10조)’은 충분히 인정됐다. 국민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규제완화와 감세가 적용된 ‘보다 자유로운 시장’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그렇게 살아온 지난 20년 동안 자살률은 3배나 늘어났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가량을 가져가는 나라는 주요 국가들 중 미국과 우리나라밖에 없다. 자산의 불평등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지난 20년 동안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 같은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자유권’ 논리만으로는 보통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더불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사회권’이다. 누구라도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획기적인 대전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유권은 시장 경쟁에서 언제나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런 불평등을 초래한 원인이 참여자의 노력 부족인 경우도 있겠지만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더 결정적인 승패의 요인은 ‘행운’이었다. 부모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높은 경우 성공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인데, 이게 바로 ‘금수저-흙수저론’이다. 부모가 부자이거나 빈자인 것은 행운의 요소인데, 이것이 행복추구의 영역에서 결정적 요소가 되는 사회라면 문제가 큰 것이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만 행운인 건 아니다. 우수한 두뇌를 타고났거나 탁월한 신체적 조건이나 미모를 타고난 경우도 엄청난 행운이다. 정반대의 경우는 불운이다. 지적 능력과 정서적 능력이 낮고 신체적 조건도 좋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그리고 다수의 보통사람들은 행운과 불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그런 천부적 행운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게 만약 신의 뜻이라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인간 사회의 ‘다양성’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다양성을 격차(불평등)로 해석해선 안 된다. ‘서로 다르다’는 의미의 다양성이 불평등이라는 이름의 경제사회적 서열화와 구조적 차별로 이어지는 사회에서는 행복추구권이 보통사람들의 실질적인 행복 추구로 이어지긴 어렵다.
천부적 행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칭송하고 그의 능력을 찬양하는 것은 좋다. 왜냐하면 그의 탁월한 능력과 성과 또는 업적 덕분에 해당 사회가 얻는 이익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최종적으로 너무 많은 분배 몫을 가져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런 승자독식에 가까운 분배 방식이 용인되면 순차적으로 그 다음 크기의 행운(능력과 성과)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자기 몫을 가져갈 것이 분명하다. 이럴 경우 대다수의 불운한 사람들은 극빈자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승자독식 모형이 계속 되다보면 나중에는 특별하게 행운이나 불운을 가지지 않은 다수의 보통사람들마저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우리는 이런 광경을 시장만능주의 사회에서 보게 된다.
이런 승자독식의 시장만능주의 사회에서는 행복추구권이라는 이름의 자유권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특별한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은 행복추구에 실패할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천부적 행운아들에게 기존의 거대한 분배 몫 대신에 적정 수준의 분배 몫과 함께 사회적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건 어떨까? 이런 일이 노동시장의 일차분배와 복지를 통한 이차분배(재분배)를 통해 제도적으로 이뤄진다면 순차적으로 천부적 재능이라는 행운을 가진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경제사회 체제야말로 경제성장에도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IMF에서도 불평등이 큰 격차사회는 경제성장이 어렵다는 결론을 냈음을 상기해보면 더 그렇다.
나는 성장기 단계에서 겪었던 개인적 경험과 의과대학 졸업자라는 이유로 건강권에서 출발해 사회적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의료보장의 제도적 미비로 인해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하도록 해주는 방법은 이들에게 의료보장의 혜택을 제도적으로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건강권 보장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성과를 냈다. 그럼에도 오히려 국민의 행복 수준은 더 떨어졌던 것이다.
결국, 나는 2007년 복지국가 운동을 시작할 때쯤에는 건강권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불어 행복추구권과 자유권만으로는 결코 높은 수준의 사회적 행복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유권은 반드시 사회권과 동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사회경제적 행운과 천부적 행운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보통사람들이나 심지어 천부적으로 불운한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거나 최소한 구조적 불행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은 이렇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불운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조적 불행은 거부해야 한다. 행운·불운의 여부를 떠나 사회구성원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행복추구권이 아니라 행복할 권리(행복권)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해야 할 주체는 바로 국가이며, 이것을 가장 잘 하는 국가가 바로 ‘복지국가’이다. 최근 이런 복지국가의 국민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보통사람들의 기대와 열망이 분출됐던 것이 바로 촛불혁명이었고, 이 과정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