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섭] 구조개혁을 통해 백년대계 새로운 연금체계를 만들어야
구조개혁을 통해 백년대계 새로운 연금체계를 만들어야
이재섭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지난 2월 말, 연금개혁 민간자문위원회 관계자는 언론에 연금개혁의 방향이 전환될 것이라 발표했다. 국민연금의 보험료율과 연금급여수준을 조정하는 모수개혁을 지양하고 기초연금, 퇴직연금, 특수직역연금 등 모든 공사연금제도를 포함한 구조개혁을 우선적으로 검토해 달라는 연금특위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 전환은 “국민연금개혁특별위원회(이하 ‘연금특위’라 한다.)가 그동안 무얼 했느냐?”는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잘못된 연금개혁 방향을 선회하려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높이 평가한다.
연금 구조개혁으로의 전환은 용기 있는 결단, 완성판 개혁 위한 계기로 삼아야
그동안 연금개혁은 대통령의 대 국민 약속과는 정 반대로 추진되어 왔다. 느닷없이 국회에 연개특위를 설치하고 비상근 민간자문위원회에 한 달 내에 개혁방향을 보고하게 했다. 또 다음 한달 내에 구체적 개혁방안을 만들어 보고하게 만들었다. 개혁의 출발을 알리는 회견 어디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의 노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진단, 그리고 공적·사적 연금제도들을 통해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개선하겠다는 목적과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개혁 일정에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수렴이나 국민 참여절차가 정해져 있지만, 국회일정에 따라 기계적으로 마무리 될 소지가 다분했다.
대통령의 약속대로 완성판 연금개혁을 하려면, 개혁 추진 기구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개혁 범위와 방향은 어떻게 잡을 것인가, 개혁 추진 조직과 인력은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 개혁의 절차와 일정 등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개혁의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법으로 개혁 일정과 절차를 정할 필요도 있다. 이른바 로드맵 법이다.
하지만 아무런 의견수렴이나 논의절차를 거치지 않고, 어떤 해명이나 양해도 없이, 편의적으로 국회에 연금특위를 설치했다. 외형상 여야 동수로 형평성 있게 연금특위 위원들을 구성한 듯 모양을 갖췄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여·야 어느 누구도 개혁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구도를 만든 것이 된다. 애초에 대통령 직속으로 연금개혁 기구를 설치해 대통령이 책임지고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충분한 국민 참여를 통해 완성판 연금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연금개혁 시작 단계부터 어긴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핵심 국정과제에 대한 대통령의 대 국민약속이 아무렇지도 않게 파기되고 조급하게 졸속으로 추진되는 데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한 바가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라도 이를 바로잡는 용기를 낸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향후 제대로 된 완성판 연금개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재출발에 앞서 꼭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될 선결요건들이 있다. 여기서는 먼저 그 선결요건들을 살펴보고, 그와 함께 연금개혁이 근본적 구조개혁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와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금개혁 성공을 위한 두 가지 선결요건 1: 지난 졸속 추진에 대한 해명과 책임 규명
먼저, 연금개혁을 대통령 약속과 달리 졸속으로 추진하게 된 배경과 책임 소재를 밝혀야 한다. 윤 대통령은 작년 12월 국정보고회의에서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연금제도를 포함하여,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을, 국민이 적극 참여하여 추진하여, 최소 20~30년 이상 연금개혁 논란이 없을 연금개혁의 완성판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누가 들어도 믿음이 가는 대 국민 약속이다. 또한 토론회 등에서 “대통령 직속으로 연금개혁 기구를 설치하여 (대통령이) 책임 있게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약속도 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연금개혁의 범위, 개혁 일정과 개혁기구 설치, 개혁 절차와 방법 등에서 대통령 약속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연금개혁이 추진되어 왔다. 의도적으로 핵심 국정과제에 대한 대통령의 대국민 약속을 무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왜 제대로 된 개혁 구도를 짜지 못했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대 국민 약속과 핵심 국정과제들에 대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만이 대통령이 확언한 연금개혁의 완성판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연금개혁 추진 기구를 다시 구성할 수 있고, 개혁 추진 절차와 일정 등을 그에 맞게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국민들은 대통령의 완성판 연금개혁의 약속을 신뢰하게 되고 제대로 이행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개혁 성공을 위한 선결조건 2: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큰 그림을 제시해야
두 번째로는, 대통령이 약속한 연금개혁 완성판의 모습이 무엇인지, 연금개혁이 완성될 때 국민들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 지에 대한 큰 그림(grand vision)이 제시되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연금개혁을 핵심 국정과제로 선정했고, 또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연금개혁의 완성판을 만들겠다는 대단한 약속을 국민들에게 강조했다. 그러기에 반드시 그 완성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과거 정부들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연금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연금개혁을 통해 국민의 삶을 어떻게 개선하겠다는 큰 그림은 제시하기를 꺼렸다.
그것은 공적연금개혁을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해야 하는 개혁’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공적연금제도의 도입 목적은 국가주도로 세대간, 계급간 연대와 협력을 담보하여 국민들의 노후의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근로세대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치고 안심하고 도전하고 가정을 꾸미며 살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러한 공적연금 본래의 목적과 기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지 못하고 기금고갈이니 재정파탄이니 하는 극단적이고 부정적 모습만을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왔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의 상상력을 제약하여 우리나라 연금정책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고 정책실패를 불러왔다.
부정적이며 빈곤한 상상력이 우리나라 연금정책의 실패를 불러와
우리나라 복지제도들은 권위주의 체제 해체와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다. 공적연금 같은 복지제도들은 지속적으로 축소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고, 국민연금이 채 자리도 잡기도 전에 급격한 급여삭감 처분(?)을 연금개혁이라는 이름하에 받고 또 받았다. 이미 제도적 복지국가의 성숙기를 거쳐 황금기를 향유한 국가들이 비대해진 복지 살을 다이어트 하는 모습을 보고, 영양실조에 걸린 몸에 살을 더 빼라고 강요하였다.
연금 기금고갈, 자식 세대에 대한 도적질, 보험료 시한폭탄 돌리기 등의 신조어를 끝없이 만들어 내어 공적연금제도의 숨통을 옥죄었다. 그러다보니 연금개혁은 바로 삭감개혁으로 인식되었고 그 때마다 연금제도 개혁은 국민들의 원성이 되었다. 연금제도는 소중한 보물이 아니라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계륵처럼 취급되었다. 국민의 행복한 노후의 삶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연금학자나 전문가들은 수리적 계산이나 기술적 방법론에 천착하면서 국민들의 불안정하고 비참한 삶은 두 번째 문제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연금개혁의 완성판이 이루어지려면 우선적으로 기존의 시각을 버리고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국가의 다양한 인적, 물적, 정보적 자원들을 최대한 지혜롭게 조합하여 국민들의 안전하고 존중받고 행복한 노후의 삶을 보장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노인들이 안전하고 존중받는 삶을 누리는 것은 물론, 젊은이들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치 있는 일들에 도전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꿈과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안전판을 만들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연금개혁의 완성판은 그런 비전선언으로부터 출발해야만 이룰 수 있다. 역대 우리나라의 연금개혁의 논의에서는 물론 지금도 그런 철학적 고민과 논의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왜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세계 최고의 평가를 받는 K-한류 명품국가가, 노인 빈곤과 자살, 초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K-연금체계를 만들 발상의 대전환은 하려 하지 않는가?
근본적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아직 기회는 있다. 연금개혁의 큰 그림(비전)을 바라볼 수 있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연금제도들, 특히 공적연금제도들이 그 큰 그림을 완성하는데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제도 상호간에 충돌이나 갈등으로 서로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연금제도가 가지고 있는 그런 충돌과 갈등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별연금별 수리 조정이 아니라 연금제도 전체를 비교하면서 근본적이고 구조적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각 연금제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나라 각각의 공적연금제도들은 한마디로 정체성이 모호하여 자신이 수행해야 할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기초연금의 경우 빈곤노인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부조 제도인지, 사회적으로 취약한 노인 모두에게 조건 없이 급여를 지급하는 사회수당인지 성격이 모호하다.
기초연금을 특수직역연금 수급자들에게 일률적으로 지급하지 않는 제도도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없다. 특수직역연금을 받지만 소득이 하위 70%에 해당되는 데도 기초연금을 못 받게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 중복 수행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그 결과 적정 소득 재분배 수준에 대한 기준이나 타당성 평가도 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국민연금 수급액에 따른 기초연금 삭감제도는 국민연금 가입 유인을 저하시켜 제도 발전까지 저해한다. 공적연금 개혁 논의 시 목표 소득대체율을 설정할 때 기초연금을 포함할 것인지 결정하기도 어렵다. 노인 30%는 기초연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금개혁 시마다 이런 문제들을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제대로 된 개혁 논의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이 모든 문제들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기초연금의 성격을 명확히 하지 않은 때문이다. 예를 들었을 뿐이지 기초연금뿐만이 아니다.
공직자들을 위한 특수직역연금은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함께 보험료를 부담하는 사회보험연금 기능과, 고용주가 모든 재원을 부담하는 기업연금 기능이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국민연금과 제도 비교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제도 가입 당사자들인 고용주(국가)와 피고용자(공직자)의 보험료 부담 책임도 불분명하다. 그러다보니 공직자는 공직자대로, 민간 근로자는 그들대로 불만과 갈등이 쌓이며 합리적 제도 발전 논의도 어렵다. 위에서 예시로 열거한 제반 문제들만으로도 우리나라 연금제도 개혁을 조급하게 단선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연금 구조개혁은 불가능하지 않다
전체 연금제도를 놓고 각각의 제도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비교 가능하게 구조를 바꾸는 연금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몇 가지 요건만을 갖추면 충분히 가능하다. 우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문제를 진단하고 사실의 파악하고 비교하여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둘째, 국회보다는 대통령이나 총리 직속으로 상설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 다수의 부처가 관련되어 있고 이해 관계자들이 달라서 강력한 의지를 가진 리더십이 인내로 이끌고 가야 성공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정치구도 상 정치일정에 휩싸이기 쉬운 국회는 정부에서 만든 근본적, 구조적 개혁대안을 최종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구조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특수직역연금과 국민연금의 구조를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민·관 공적연금제도 통합이라고 흔히 부른다. 하지만 공적연금 구조일원화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특수직역연금을 민간 근로자 연금과 같이 국민연금 부분과 퇴직연금 부분으로 구분하여 상호 비교 가능하게 하되, 제도 운영은 지금과 같이 독립적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제도변경에 따른 막대한 과도기 비용도 막을 수 있다.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을 통해 특수직역연금(군인연금 제외)과 국민연금의 수리적 형평성은 거의 맞춰졌다. 따라서 공직 사회도 귀족연금이라는 비난과 추가 삭감압력을 받으면서까지 현재의 특수직역연금제도의 구조를 굳이 고집할 실익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연금개혁이 구조개혁을 우선적으로 논의하는 것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완성판 연금개혁을 위해 여기서 제안한 내용들이 개혁 과정에 반영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지금의 개혁기구와 일정으로는 대통령이 약속한 완성판 연금개혁을 이룰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연금특위 간사들과 민간자문위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책임성을 믿는다. 진정 국민들 노후의 삶과 국가의 100년 대계를 위한 신 연금체계 구축을 위한 개혁기구와 일정 논의부터 다시 시작해 주기 바란다.
이재섭 사회정책학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사)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겸 공적연금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