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비 불안의 근원적 해법을 요구하며
지난 3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부과체계 개편은 지역 가입자와 직장 가입자 간의 형평성 문제와 ‘고소득자가 보험료를 덜 내거나 소득 있는 피부양자가 무임승차를 하는 것’ 등의 불합리를 개선하기 위해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오랫동안 요구해오던 사안이다. 특히 이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 사업으로 추진되었고, 1년 동안 관련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완성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보건복지부 장관의 일방적 결정으로 유예되었던 사안이기도 하다. 결국 부과체계 개편은 촛불 혁명과 박근혜 파면으로 다시 살아난 정책이기에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법률안의 내용과 의미
이번 개편으로 성별과 나이 등을 기준으로 소득을 추정해서 건강보험료를 부과하던 ‘평가소득’이 폐지된다. 지역가입자의 자동차에 부과되던 건강보험료도 폐지되거나 줄어든다. 소득이 있는 피부양자가 직장가입자인 자녀나 가족에게 무임승차 하던 것도 이제 어렵도록 변경된다. 이들은 무임승차 대신에 지역 가입자로 전환되어 건강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 또 형제와 자매는 피부양자에서 제외되었다.
이 법률의 통과로 직장 가입자들 중에서 임대소득이나 금융소득 등 월급 이외의 소득이 연간 3,400만 원 이상(1단계)이거나 2,000만 원 이상(2단계)인 고소득자들도 건강보험료를 더 내게 된다. 또 ‘7년 동안 3단계’로 진행되도록 설계된 정부안이 국회의 심의 과정에서 ‘5년 동안 2단계’로 변경되어 시행 기간이 2년 앞당겨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이 선거를 앞두고 진행되면서 재정에 대한 고려 없이 전체적으로 건강보험료를 경감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 부과체계 개편으로 인해 전체 건강보험 재정은 연간 3조 982억 원이나 적자가 나는 것으로 최종안이 통과되었다.
부과체계 개편은 정책의 목표가 불공평한 부과체계를 바로 잡아서 부담의 형평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즉 건강보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은 반영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재정 중립 상태로 부과체계를 개편해서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안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선거를 앞둔 여야 정치권은 이렇게 중차대한 법안조차 원칙에 어긋나게 천박한 ‘선심성 정책’으로 타락시켜 버렸다. 이는 온 국민과 함께 개탄할 일이다.
여야 정치권의 천박성: 온 국민과 함께 개탄할 일
지금까지 각 정당들은 부과체계 개편을 통해 최소 5조 1,817억 원(국민의당)에서 최대 9조 3,400억 원(더불어 민주당), 또는 9조 4,500억 원(정의당)의 재원을 추가적으로 더 마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해서 보건복지상임위원회에서 심의해 왔었다. 건강보험연구원의 자료를 근거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시행한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에서도 퇴직, 양도, 상속, 증여소득 등 보수 외의 소득을 가진 가입자들로부터 5조 2,897억 원과 금융소득에 대한 건강보험료 1조 3,480억 원 등 약 7조 3,017억 원을 추가적으로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되었다.
2017년 현재 우리나라의 건강보험료율은 소득의 6.12%로 일본의 8.5%나 대만의 9.1%와 비교해도 2/3 수준이고, 프랑스나 독일의 15%에 비하면 거의 1/3수준이다. 그동안 시민사회와 학계 전문가들이 건강보험료의 적정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여야 정치권은 부과체계 개편으로 인해 애초 약속한대로 건강보험재정을 증가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연간 3조 원이 넘는 재정 적자를 용인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것이다.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이 중요한 이유
지난 3월 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부과체계 개편 방안을 담은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되던 시간에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차기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방안: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정책 제안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10년 동안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이 63% 수준에서 정체되면서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과 이로 인한 고통은 지속되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중증 질환에 걸리면 발생할 고액 의료비 부담은 재난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전체 가구의 88.1%가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등 다양한 형태의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그리고 민간의료보험료로 가구당 월 평균 30만 8,265원을 납부하고 있다. 이날 대토론회에서는 이런 의료비 불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차기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방안으로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이 제안되었다.
전체적으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율을 OECD 평균 수준이 되도록 80%로 높이고, 입원 진료의 경우에는 90%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에 더해, 비급여 항목을 전면적으로 급여화하고, ‘연간 본인부담 100만원 상한제’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 국민들이 환급율이 50%에도 못 미치는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거의 없어진다.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최대 68조 원으로 예상되는 2018년도 건강보험료 수입 외에 18.2조 원의 추가적인 건강보험 재원이 필요하다. 정부는 법률에 정해진 대로 전체 건강보험료 수입의 ‘20%를 국고에서 부담’하는 내용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2.7조 원을 추가로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으로 약 7.3조 원을 추가적으로 마련할 수 있다면, 우리 국민들은 나머지 8.2조 원(14.4%) 정도를 건강보험료 인상으로 부담하면 된다.
만약, 여야 주요 정당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해오던 대로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안을 반영했다면, 여기에서 7조 원 이상의 추가 재원이 조성되므로 우리 국민들은 개인당 월 평균 약 8천원, 가구당 월 평균 약 1만7천원의 건강보험료를 더 내는 것으로 의료비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매달 납부하던 민간의료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기존에 가입한 민간보험은 해지해서 일시불로 환급받거나 나중에 연금과 같이 받을 수 있는 보장성 보험으로 전환할 수도 있게 된다. 우리 국민들은 매월 그 금액만큼을 추가적으로 소비할 수 있고, 중병에 걸려도 의료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이는 의료비 보장을 넘어 내수 경제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공약 축소’나 ‘공약 파기’라는 야권 발 트라우마는 생기지 말아야
국민의당은 지난해 12월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를 비판하면서 ‘중부담-중복지’ 정책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적정부담-적정급여’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내용의 당론을 채택했다.
문재인 후보는 2012년 대선 TV토론에서 박근혜 후보의 4대 중증질환 국가보장 정책에 대해 ‘심장은 되고 간은 안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비판하면서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강조했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4대 중증질환 국가보장 정책이 연간 6,000억 원 수준의 국민 부담을 줄이는 정도에서 그쳤고, 결국 보장성을 확충하는 데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촛불 혁명의 수혜를 본 야권 후보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모든 의료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해야만 한다.
지난 대선 당시에 공개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재벌 대기업들이 가진 민간보험 회사들과의 유착관계 때문에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항간의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이 소문은 이재용-박근혜 뇌물 사건이나 국민연금을 활용한 경영권 승계 보장 사건으로 인해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행된 부분적인 건강보험 급여 확대나 비급여 항목의 급여화는 민간의료보험 회사의 수익 구조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는 정책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여야 주요 정당의 후보들이 당내 경선을 하는 동안 이들 정당들이 기존의 당론과 달리 오히려 ‘건강보험료를 내리고 건강보험 재정을 축소’하는 정책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걱정가 불안이 엄습한다. ‘공약 축소’나 ‘공약 파기’라는 박근혜 정권에서 우리 국민들이 겪었던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서다.
현재 21조 원의 건강보험의 누적 적립금은 내년부터 적자로 전환되고, 현재의 보험료율을 유지할 경우 2025년이면 약 20.1조 원의 적자로 전환되므로 건강보험료 인상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적립금은 국민들의 삶이 어려워져 필요한 의료이용을 못하게 되어 건강보험 급여가 덜 지출된 결과이고, 정부가 국고지원을 줄이기 위해 흑자를 쌓아 놓고도 급여 확대를 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 돈이 쌓여 있는 것만큼 국민들은 아파도 의료기관을 가지 않은 것이며, 본인부담 의료비를 더 지출하거나 불필요한 민간의료보험에 더 많이 가입을 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여야 정치권이 박근혜 정부와 꼭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연간 150만 명에 이르는 건강보험 장기 채납자 문제도 그대로 남게 되고, 가구당 매달 30만 원이 넘는 민간보험료도 계속 내야 한다. 그러고도 가난한 사람들은 큰 병이 걸리면 치료를 포기하거나 집을 팔아서 치료비를 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민간의료보험조차 가입하지 못하는 저소득층 국민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큰 병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앞으로도 여전히 의료비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될 것이다.
내 삶이 바뀌는 것이 정권 교체: 복지국가가 그것이다
물론 새 정부가 당면할 어려움은 꼬일 만큼 꼬인 외교 문제에서부터 침체한 경제 문제까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차기 정부를 이끌 지도자,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은 책임이 더 막중하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건강보험료 몇 천원 깎아주는 정책이 아니라 솔직하고 정중하게 국민들을 설득하고 어려움을 나누어 가지자고 호소하는 참 용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의료’만큼은 누구라도 차별받지 않고 필요한 만큼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담대한 선언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서럽고 고통스러운 차별은 바로 ‘의료이용의 불평등’이다. 차기 대통령은 아픈 사람이 차별받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적어도 의료에서는 형평성이 보장될 것이라는 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분명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이다. 그것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비급여의 전면적 급여화’이고, 다른 하나는 ‘본인부담금 100만 원 상한제’이다.
광화문 촛불 혁명으로 탄생하게 되는 차기 정부에서조차 건강보험료 몇 천 원을 줄여주고 현재의 낮은 보장성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면 우리 국민들 입장에서는 탄핵 이전과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렇게 해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국민건강보험의 낡은 ‘저부담 저급여’ 체계를 그대로 지속하려고 보통사람들이 지난 5개월 동안 20회가 넘는 주말을 반납하며 그렇게 끈질기게 촛불을 든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앞으로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통과된 부과체계 개편 안을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다시 한 번 개정해서 고소득자들에게 부담을 더 지우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니면 부과체계는 재정 중립상태로 개편하되,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와 연동한 약 25-30% 수준의 건강보험료 인상을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동의를 얻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차기 정권이 가져야 할 보장성 확대 정책의 목표는 더 이상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될 수준으로 의료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것이라야 한다.
대선 TV 토론에서 비춰지는 후보들의 모습만으로는 누가 바람직한 대통령이 될 것인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화문 촛불 시민의 뜻을 계승한 차기 정권의 역할이 단순히 ‘박근혜 적폐 청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투표에서 우리의 판단 기준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해답은 명확해진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정권이 바뀌면 실제 나의 삶이 얼마나 좋아지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보자가 복지국가를 만들 의지와 능력이 있는 지도자인지, 이 부분을 명확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