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시대, 교육혁신 없이는 미래도 없다
유대인 엄마들보다도 오히려 더 극성스럽게 학령 전부터 자녀 공부를 진두지휘하는 여성들은 바로 한국인 엄마들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산업화에 성공하고 어엿한 민주국가체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한국 부모들의 치열한 교육열 덕택이다. 어른이 되어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보다 공부를 더 잘해야만 한다는 경쟁의식은 현재 한국 부모들의 뇌리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이제 국민의 과반이 물질적 빈곤을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의 후유증으로 남아있는 극심한 경쟁적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대다수 한국인은 심리 정서적으로 계속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자녀들을 마치 경마시합에 내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학교성적 올리기 경쟁으로 내모는 풍토가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을까? 아직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의 육체적, 정서적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 한국의 교육현장은 해외에도 알려져 있다. 어릴 적에 떠났던 고국을 방문한 미국 아이비리그 다트머스대의 김용 총장이 고국 방문강연에서 무엇보다도 한국 학생들의 수면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을 지적한 적이 있다. 한국 사회는 문자 그대로 경쟁으로 인해 만성적으로 피곤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처절한 개인주의 사회이다. 맹렬하게 경쟁하다가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하루아침에 다 끝낸다. 삶의 동아줄에 더는 매달려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피폐한 심리상태에 도달하면 아직 어린 학생도 자살하고 나이 많은 어른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족감 없는 경쟁적인 삶
평상시에 숨 가쁜 삶의 열기에서 벗어나서, 필요할 때마다 마음의 평정심을 회복하며 얼마간의 평안한 시간이라도 즐기면서 살 수 있으려면 무엇부터 하면 도움이 될까? 외부 환경과 관계없이 내 마음속 풍요로움을 자각할 수 있다면 경쟁적 의식의 틀에서 놓여나는 경험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삶을 겉으로 보기에 만족스럽고 풍요로워 보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생각의 습관에서 자유롭게 되려고 노력한다면 삶의 만족감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습관에 익숙해지는 일이 혼자서 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가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비교하기 쉽다. 절대적 빈곤율은 낮아도 상대적 빈곤율이 높은 선진국에 사는 빈곤층이 더 불행할 수 있다. 가난한 취약국가 사람들은 다 같이 빈곤을 겪기 때문에 오히려 선진국 사람들보다 더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다.
극심한 불평등 때문에 상대적 빈곤 심리에서 야기되는 불만족과 물질적인 박탈감에 시달리는 인구가 많다면 그 비극을 개인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경쟁적 사회체제는 빈곤층과 함께 생겨나는 불평등한 인간관계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불안감을 부추기게 된다. “경쟁문화를 넘어서(Beyond the Culture of Contest)”라는 제목의 테드(TED) 동영상 강의(https://www.youtube.com/watch?v=J0ZCAbYrQ7Q)에서 마이클 칼버그(Michael Karlberg)는 경쟁 위주 삶의 방식이 현대인에게 주는 가장 큰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예술을 포함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은 본래 타고난 이타성을 발휘하기보다는 자본주의체재 내에서 자연히 좀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쟁이 주요 생존 원리로 작용하는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이 속한 경제적 계층과 관계없이 지속 가능한 행복감을 누리기 어렵다. 자신이 남보다 좋은 처지에 있다고 해서 불행한 다른 이들의 삶을 보지 않고 나 몰라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주뿐만이 아니라 명예와 권력까지도 경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도록 조직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평안한 마음 자세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면서도 동시에 이타적인 본성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적인 구조 속에서는 별 차이 없이 모두 이타심보다는 이기적인 인간성을 발현하게 되기 마련이다. 모두가 이기적인 행동에 익숙하게 되고 집단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효과성보다는 경제적 효율성이 극대화될 때 그 사회구성원은 불행해지고 사회 전체의 삶의 만족도는 줄어든다. 그러므로 경쟁심은 물질적인 발달을 선사하는 대신 인류사회 전체의 지속적인 행복감을 빼앗아 간다. 경쟁을 통해 인간사회가 물질적인 편리함과 효율성을 확장할 수는 있으나 개인 중심 사회의 경제체제는 다수 구성원에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안겨준다.
경쟁을 넘어 생명공동체를 살리는 교육
복지사회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가능한 효과적으로 사회문제를 예방하는 시스템을 갖춘 사회이다. 불평등문제에서 기인하는 다양한 병적인 증상을 차후에 치유하는 사회복지서비스만으로 대다수 인구가 만족하며 살 수 있는 복지사회로 진화하기는 어렵다. 자살, 우울증, 중독, 사기, 조작 등 각종 불법행위가 발생하기 전에 예방할 수 있으려면 상처가 생긴 후에 치유하기보다는 심층적인 해결책이 우선되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내면에서 만족감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 본래의 자아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내적인 영성훈련과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한다면 어떨까? 개인의 행복이 사회구성원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삶의 만족도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느끼게 하는 살아있는 교육체제로 변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함께 나누는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고 협력과 연대에서 오는 행복감을 일찍이 성장 과정에서부터 체험하게 한다면 한국 사회처럼 극심한 경쟁문화가 만들어내는 불평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들어본 적이 있는 ‘홍익인간’ 개념은 우리나라 고유의 자랑스러운 건국이념이자 현재 교육법 제1조에 명시되어 있는 교육철학의 기본정신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인류를 도우라’는 가르침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인 고유의 생활철학으로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영성적 사회자산이다. 이 홍익정신은 초개인주의적인 의미를 가지며 인본주의, 생명사랑, 사회복지, 평등, 평화, 봉사, 정의, 공익정신 등 공동체 중심적인 원칙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홍익사상은 메마른 현대생활방식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하는 집단주의적인 가치관을 두루 포용하고 있다. 민족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홍익사상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 유교의 인사상, 불교의 자비행과 상통하는 인류애적인 이상을 품고 있다. 한국 고대사회 건국의 기반을 이룬 ‘홍익인간’ 이념은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세계인 모두 가슴 속에 내재화해야 할 지극히 심오한 이상적인 인간형을 담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를 맞은 글로벌사회의 모든 국가에서 홍익정신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면 불평등과 직결된 각종 사회문제뿐만이 아니라 지구환경 보호에 도움이 되는 적극적인 경제체제로 더 빨리 변화하게 되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신자유주의 풍파에 휩싸인 한국은 말뿐인 교육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경쟁 사회의 틀 속에서 전통적 세계관의 가치체계가 거의 통째로 무너진 듯한 느낌이다. 사실 한국 땅에 몸담고 사는 우리는 이제 미국에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전투적인 태세로 물질만능주의 흙탕물 속에서 전 국민이 몸살을 앓고 있다. 생명경시와 물신 숭배적인 삶의 패턴을 자리 잡게 한 산업화과정을 거치면서 기득권 수호를 위한 조직적인 부패가 가속화 해왔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현재 한국 사회는 ‘이기는 자가 모두 갖는다’라는 능력주의 제도의 그늘에서 홍익이념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고 있다. 사교육이 제도화된 가운데 공익을 대변해야 하는 현재의 교육시스템은 사익을 추구하는 합법적인 장치로 추락한 상태이다.
경쟁을 부추기는 언어문화
우리나라의 경쟁적인 교육 현실과 관련된 혼란스러운 집단의식을 언어사용과 관련하여 숙고해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을 보통 혼용해서 쓰는데, 이 두 가지 표현을 불명확하게 섞어 쓰는 언어습관이 무의식적인 혼돈을 만들고 있다. ‘틀리다’는 말과 같은 선상에서 쓰이기 때문에 남과 ‘다르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면 ‘틀렸다’ 또는 ‘옳지 않다’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주입되게 된다. 누구나 거의 다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판단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부모 역할을 하는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은 남이 다 하는 대로 자녀를 학원에 경쟁적으로 보내고 남다르지 않게 자기 자식도 일류대학에 가기를 소원한다. 제각기 다른 인지능력, 감성적 특성과 체력조건을 가진 아이들을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학력 경쟁의 마당에 올려놓고 남처럼 승리하기를 바라는 부모에게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비싼 학원비를 마련하려고 희생적으로 땀 흘려 일하는 부모를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아이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와 어떻게 다른 특성이 있고, 누가 뭐래도 고유한 존재감을 가진 소중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대신, 무조건 학력 위주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그 부모는 분명히 남과 다르지 않지만 틀린 방식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경쟁주의 체제로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한국 학생들이 자주 들어 온 “다 너 잘되라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거야”라는 부모의 주장은 생각해보면 정말 한국 고유의 공동체적 가치관과 맞지 않는 말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아서 자기 자식이 남보다 월등한 생활을 보장하는 직업을 갖도록 뒷받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해받을 수 있다. 자식이 잘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인주의적인 부모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균형을 우선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합리적인 바램일 뿐이다. 문제는 한국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전 세계로까지 썩은 냄새를 진동시키는 공직자들의 부패 현상은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공부를 남보다 잘한 사람들이 ‘법 기술자’ 행세하며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전문직과 고위공무원직을 차지한 채 국민을 농락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 이익만 남몰라라 추구할 때 전체 사회가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가를 직시해야 한다. 현재 ‘검찰 공화국’으로 후퇴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대중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꿈쩍하지 않는 오만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뻔뻔한 행태를 보라! 기성세대가 피땀 흘려 이룬 산업혁명의 성과는 물론, 젊은이들이 목숨 바쳐 이룬 민주제도까지도 한꺼번에 거의 봉건사회 수준의 독단적 행정방식으로 퇴보시키고 있지 않은가? 기본적인 공익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미성숙한 사람을 ‘영감님’으로 부르는 검찰의 행태는 또 어떻나? 공동체 중심의 도덕적, 윤리적 사회원칙을 하루빨리 회복시키려면 보다 평등한 언어문화 먼저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인격적으로 성숙한 진정한 어른만을 ‘어르신’ 대우하는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가 사회조직 속에 뿌리내리도록 진정한 의미의 민주교육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집이나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평등한 대화가 당연해지는 한국 사회로 진화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초개인 사회로 가는 의식의 전환
‘상부상조’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익숙하게 들리는 말이다.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라 ‘두레’나 ‘계’처럼 서로 돌아가면서 공동체 회원들이 평등한 자격을 행사하며 써 온 말이다. 전통 한국 사회에서는 여럿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상호주의적인 (mutualism) 삶의 방식을 오랫동안 실천해 왔다. 서구사회와 비교해서 한국은 혈연을 비롯하여 지연과 학연 등으로 더 끈끈한 인간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고 무형의 사회자본인 집단주의적 연계망이 다양하게 활성화되어 있다. 켄 윌버(Ken Wilber)가 분류한 인류의 의식발달단계로 보자면 한국은 가족주의와 종족주의 성향이 아직도 매우 강한 집단의식 발달단계에 있다.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적인 민주시민의식이 경쟁적으로 발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이익집단들의 이기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사회 전체의 공익이나 장기적인 장점이 있는 보편적 복지정책에 대한 비전이 막힌 상태에 있다. 미국이 별로 진취적이지 못한 정책으로써 매우 미흡한 복지서비스를 점진적으로 발달시켜온 것같이 (의료보험제도를 제외하면), 한국도 미국에 못지않은 복지 후진국 (reluctant welfare state)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발달 면에서 ‘전체 인류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도달한 소수 진보파가 사회변혁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그 숫자가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만약 다시 고대사회에서처럼 보편적 복지를 실천하는 상생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생명을 존중하는 복지사회체제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계에 몸담고 지도자 역할을 자처하는 지도자 아닌 지도자들과 자기가 혼자 잘나서 나라 경제를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착각하는 소수 부유층 경영인들이 하루속히 깨어나야 한다. 다 함께 잘 사는 구조라야 기득권 혜택을 지속해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필요가 있다.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는 1920년대 대공황으로 인해 사익과 공동체 복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역사적인 교훈 덕택에 마련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는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세금을 더 내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사실은 한국 기업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숨겨진 홍익사상에 뿌리내린 공동체중심의 ‘오래된 미래’를 성공적으로 펼치려면 서양의 물질문명으로부터 들어와 현재 한국 사회에 접목된 개인주의를 넘어서 보다 초개인주의적인(transpersonal) 가치관을 다시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공식적으로 선진국 국민이 된 한국인은 이제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민주시민의식이라는 두 기둥 위에 우리 고대사회의 정신적 문명을 다시 꽃피울 수 있다. 초개인의식이라는 심리학 언어는 아직 우리 대중문화에서 익숙하지 않지만 ‘홍익인간 제세이화’라는 한국인이 앞으로 개척해 나가야 할 상생의 길(道)은 한국인의 DNA에 힘차게 살아있다고 본다. 경제 대국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진 한국인은 이제 ‘인류 하나됨(oneness humanity)’ 의식 수준으로 집단지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과감하게 도시 중심의 경쟁적 학군을 떠나 어린 자녀와 함께 귀촌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경쟁의 엄혹한 현실을 무시하는 무책임한 부모들이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겠으나 물질만능주의라는 허상 위에 세워진 교육제도를 탈피하려는 부모들은 남과 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한국인 고유의 상생적 가치관에 충실한 부모들로 보인다. 콘크리트 빌딩 숲을 떠나 보다 건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교육 본연의 목적인 진선미 가치를 추구하는 부모들은 ‘틀린’ 결정이 아니라 남과 ‘다르게’ 자신감 있는 선택을 한 자유인으로 보아야 한다. 무모하게 경쟁의 틀에서 탈락했다고 비난받기보다는 후세대를 공동체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 글로벌 시민으로서 남다르게 성장시키려는 교육관을 가진 부모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에 몇 번씩이나 ‘화이팅’을 외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 것 같은 한국 사회에서 “우리 다 함께 잘 살기 위해 공부 열심히 해야지”라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 지혜로운 부모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편협한 개인주의나 민족주의 이념이 아니라 널리 인류 전체의 복리를 증진하고자 하는 비전과 사명감을 키우는 차세대교육에 앞서는 부모와 교육자들을 적극 지원하는 교육체제로 변혁하여야 한다.
요즘은 최고속으로 변화하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 대비할 수 있는 교육체제를 마련하기를 원하는 교육계에서 창의성 교육을 중요시하는 추세이다. 그런데 창의성은 개인의 고립된 아이디어 창출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탁월한 인지능력의 소유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후 그 발명의 씨앗이 실현 가능한 완성품으로 탄생하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의 이해와 지지, 협력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새로운 창조행위가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의미 있는 공헌이 되기 위해서는 공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심도 있는 토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사람들이 말하는 융합적 사고는 기본적인 인성을 함양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 홀로 외롭게 연구해 낸 실험결과가 인류 전체에 유익한 결과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영성적인 정체성이 확고한 여러 사람의 미덕이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는 사회체제가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우주여행 사업으로 더 많은 돈 벌기를 꿈꾸고 있는 일론 머스크(Elon Musk)같은 부유한 개인이야말로 공익을 염두에 두고, 남보다 먼저 창의성을 꽃피울 지구인으로서의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지식과 기술, 재력이 최대 다수의 복리와 공익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영성적 지혜가 없다면 미래의 인공지능 시대는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소수 자본가와 기술자들의 독단적인 결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하나됨 의식’을 훈련하는 교육체제의 가능성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대중이 고통을 느끼는 가운데 진정 평온한 삶을 오래 유지하기는 어렵다. 데이터에 의해 작동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고 영혼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서 설사 감성지능과 영성지능이 비교적 낮은 경우라고 해도, 사람이면 누구나 영성적인 존재감을 체험하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서 살아남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체제에서 결국은 소수가 누리는 혜택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식의 변화를 동기부여 하는 기초적인 내재능력이 없이 모든 삶의 영역이 통합적으로 조화롭게 조직된 세상으로 진화하기는 어렵다. 보다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삶에 대한 개인의식의 변화야말로 제도적인 사회변화를 창조해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사회적인 변혁으로 향하는 본질적인 사고의 전환은 영성적인 기반 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개인 영혼의 온전함이 외부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회적 공헌을 중시하는 물질적 창조로 이어지려면 어릴 때부터 영성적인 정체성을 강화하는 교육제도를 체험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총량은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고 한다. 식량이 부족하지 않고 인류에게 결핍된 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인류의식이다. 지구인 모두가 한 몸통처럼 연결된 생명 유기체로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집단의식이 없어서 전 세계적인 식량 공급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자비로운 의도와 지혜로운 조직력이 없이 지구 반대편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글로벌 차원의 공급력이 생길 수 없다. 인간이 가진 기술적인 역량만으로는 불평등이 사라진 제도적 장치는커녕 모든 인류가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식량 공급망조차 마련하기 어렵다. 결국, 현대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해결은 인류가 어떤 의식 수준에서 살기를 원하는가에 달려있다. 인류애를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실천하려는 혁신적인 교육제도는 인류사회의 분리의식을 더는 용납하지 않을 때 현실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가 가능한지는 우리가 하나라는 깨달음과 더불어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집단의식수준으로 진보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만족하고 풍요로운 미래세대를 위해 각자 그리고 함께 상생적인 의식발달을 훈련하는 창조적인 교육체제를 생각해 본다.
도영인 전 교수는 미국의 University of Southern Maine과 한국의 우석대학교에서 평생 사회복지학을 가르쳤다. 정년퇴임을 하고서는 영성, 과학, 생태 등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데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