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 침체와 고금리 압박이 이어지면서 재계가 유례없는 ‘정리의 계절’을 맞고 있다.
국내 주요 그룹들이 연말 인사를 계기로 일부 계열사 중심의 조직 개편과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특히 그룹 내 ‘2인자’의 용퇴와 주력 계열사의 대규모 임원 축소 등,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총수 중심의 통제력 강화와 세대교체 시도가 뚜렷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 삼성, 정현호 부회장 퇴진과 ‘책임 경영’ 강화
7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그룹에서는 그룹 내 핵심 실세로 불리던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이 8년 만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정 부회장은 후진 양성을 명분으로 보좌역으로 물러나고, 삼성전자는 전영현 단독 체제로 재편된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 임시 기구였던 사업지원TF가 사업지원실로 격상되고, 새 실장에 박학규 사장이 임명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재계에서는 이 조치를 두고 2017년 해체된 미래전략실의 역할을 대신하며 이재용 회장의 책임 경영과 사업 실행력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하고 있다. 향후 사장단 인사와 임원 승진에서도 핵심 사업과 미래 기술 중심의 옥석 가리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 SK, ‘비상 경영’ OI(오퍼레이션 임프루브먼트) 실행
SK그룹은 예년보다 한 달 앞선 사장단 인사 단행에 이어, 그룹 차원의 ‘몸집 줄이기’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수펙스추구협의회의 인력 규모가 절반 가까이 축소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주력 계열사인 SK텔레콤은 임원 규모를 30%가량 감축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최태원 회장이 강조한 OI(Operation Improvement) 기조를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긴 결과로 해석된다. 이는 비용, 조직, 프로세스 등 전반의 효율을 극대화하여 재무구조의 안정성과 사업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비상 경영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 현대차·LG, ‘미래 기술’ 중심의 인력·비용 재편
현대차그룹은 글로벌 시장 불확실성 속에서 내년 경영 전략의 핵심을 ‘현지 생산 확대’와 ‘원가 절감’으로 설정했다. 대외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이 같은 기조는 이미 그룹 주요 계열사에서 나타났는데, 현대제철은 사상 처음으로 전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시행했으며 현대위아 등에서도 인력 구조조정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LG그룹은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의 용퇴를 포함해 고위직 변화를 단행했고, 연말 승진 인원 규모도 98명에 그치는 ‘슬림 인사’를 이어갔다.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 등 주요 계열사 역시 희망퇴직을 진행하며 군살 빼기에 나섰다. 그룹의 역량은 인공지능(AI) 기반의 생산성 향상 등 미래 기술 경쟁력 확보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 롯데, 부회장단 전원 용퇴…전방위적 ‘세대교체 칼날’
롯데그룹은 지난 11월 인사에서 가장 과감한 인적 쇄신을 선보였다. 4명의 부회장이 모두 용퇴하고, 전체 CEO의 3분의 1이 교체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2022년에 도입했던 HQ(Head Quarters) 체제마저 폐지하며 그룹의 의사결정 구조를 단순화하고 계열사별 책임경영 체제를 강화했다.
이는 유통, 건설 등 핵심 사업의 부진을 타개하고 그룹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신동빈 회장의 강력한 의지로 읽힌다. 롯데면세점, 롯데칠성음료 등 주요 계열사에서 희망퇴직이 진행되는 등 그룹 전반에 걸친 세대교체와 구조조정의 칼날이 이어지고 있다.
■ “인사는 곧 생존”… 성과주의 리더십 강화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전무)은 “부회장급까지 용퇴를 결정하는 최근의 흐름은 위기 상황에서 총수 중심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실제 성과를 낼 수 있는 인물만 남기려는 의지를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재계에서는 이번 연말 인사가 단순히 연공서열에 대한 ‘보상’이 아닌, 생존을 위한 냉정한 ‘옥석 가리기’의 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 SK의 대규모 인적 쇄신과 LG, 현대차, 롯데의 고강도 조직 재편은 향후 1년간 국내 재계의 판도를 결정할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