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근무 환경이 승무원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10일 오전 10시,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공공운수노조는 기자회견을 열고 대한항공 장거리 노선에서 발생한 승무원의 의식 상실 사고를 강하게 규탄했다. 노조는 이번 사고가 단순한 개인의 건강 문제가 아닌, 항공사 운영 방식과 제도적 미비로 인한 구조적 산업재해라고 규정하며 정부와 항공사의 즉각적인 책임 규명을 촉구했다.
■ 장거리 비행 중 의식 잃은 승무원…개인 질병 아닌 ‘산업재해’ 호소
사고는 7월 초 대한항공 KE074편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 14시간 30분에 이르는 장거리 비행 중이던 해당 승무원은 스낵 서비스를 마친 직후 기내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료 승무원들의 신속한 응급조치와 착륙 후 병원 긴급 이송에도 불구하고, 사고 이후 대한항공과 국토교통부는 이를 개인의 건강 이상으로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노조는 항공사와 정부가 산재 인정 및 구조적 원인 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고 비판했다.
공공운수노조 변희영 부위원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장시간 야간 비행이 승무원에게 가혹한 환경임을 강조했다. 그는 “장시간 노동과 야간 노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비행 현장은 인간이 정상적으로 버틸 수 없는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고용노동부는 즉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철저한 감독을 통해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 ‘밥밥스’ 실험의 그림자…승무원 탈진 부르는 무리한 업무 강도
최근 대한항공이 일부 장거리 노선에서 시행한 기내식 제공 순서 변경, 이른바 ‘밥밥스’ 실험이 승무원들의 과로를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나왔다. 기존의 ‘식사-간식-식사’ 방식에서 ‘식사-식사-간식’으로 변경된 이 실험은 사실상 승무원들의 중간 휴식 시간을 없애 업무 강도를 극도로 높였다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이미 탈진과 코피 등 신체 이상 증상이 반복적으로 보고됐으나, 항공사는 이를 단순한 ‘실험’으로 치부하며 구체적인 대책이나 보호 조치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노조는 전했다.
23년째 대한항공에서 근무 중인 편선화 여성부장은 현장의 고통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는 “하늘 위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 실험 도구로 다뤄지고 있다”며 승객의 편의를 이유로 강행된 실험이 현장에 막대한 부담을 주고 있다고 토로했다. 또한 침대 수 부족으로 순차적 휴식이 지시되면서 사실상 일부 승무원은 쉬지 못하고 계속 근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현장의 문제는 비단 대한항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아시아나항공노조 권수정 위원장은 구조적인 인사관리 문제와 부당한 휴가 통제 사례를 폭로했다. 그는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채 비행에 나서야 했다”며 휴가 승인 거부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항공사 운영 구조의 문제라고 꼬집었다.
아시아나항공노조는 최근 193건의 휴가 불승인 사례를 노동부에 신고했으며, 노동부는 이에 대해 다섯 차례나 검찰에 내사지휘를 요청했지만 실질적인 처분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권 위원장은 대한항공 사외이사로 전직 검찰 간부가 재직 중인 점을 언급하며, 구조적 책임 회피와 이해충돌 우려가 크다고 경고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절박한 문제를 호소해도 제도와 권력이 철저히 무관심한 현실에 개탄했다. 또한 작년에 진정을 넣었던 승무원이 올해 또다시 같은 고통을 겪었다며 휴일 무단 변경, 연장수당 미지급, 생리휴가 편법 사용 강요 등이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밝히고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 유럽 대비 30% 긴 비행시간…승무원 기본권 침해 심각
참가자들은 한국 승무원이 겪는 노동 조건이 국제 기준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유럽연합의 경우 연간 최대 비행시간이 900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한국 승무원은 연간 1,200시간까지 비행에 투입되고 있다. 이는 무려 30% 이상 높은 수치다. 특히 12시간을 넘는 장거리 노선에서 제대로 된 휴게시간 없이 연속된 서비스 제공이 요구되는 현실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났다. 승무원 전용 침대 공간이나 안정적인 교대 근무 체계 없이 진행되는 이러한 근무 조건은 결국 승무원들의 심각한 건강 침해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공공운수노조는 승무원의 피로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항공안전과도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건강을 잃는 서비스를 강요하는 산업 구조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날 노조는 기자회견을 통해 ▲ 비행시간 기준을 유럽 수준으로 하향 조정할 것 ▲ 충분한 휴게시간과 공간을 보장할 것 ▲ 서비스 증가에 따른 인력을 충원할 것 ▲ 근무 조건 변경 시 노조와 협의할 것 ▲ 노사정 협의체를 구성해 구조 개선 대책을 논의할 것 등 다섯 가지 개선 요구안을 제시했다.
참가자들은 “건강을 잃는 서비스는 지속될 수 없다”며 “우리는 실험 도구가 아니다. 이 실험은 지금 당장 멈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객실승무원의 노동조건 정상화 없이 국민의 안전도 보장될 수 없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공공운수노조는 향후 고용노동부의 공식 답변 여부와 개선 조치 실행 상황을 주시하며 추가 대응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항공 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승무원의 건강과 안전은 단순한 개별 근로자의 문제를 넘어 항공 운항의 안전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따라서 정부와 항공사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실질적인 개선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