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새로운 100년을 맞기 위해

이상구(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장)

언제나처럼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오고 있습니다. 살을 파고드는 모진 찬바람만큼이나 힘든 나날들이지만, 동해안 일출을 보러 밤 세워 차를 달려가는 것은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면서 새롭게 맞이할 한 해에 희망을 보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2018년 한 해는 참으로 대단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더니, 어느 사이에 남한의 대통령이 평양의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촛불혁명으로 87년 6월 항쟁 이후 30년 만에 또 한 번의 시민혁명을 만들어낸 국민들에게 보답이나 하듯이, 휴전선의 GOP가 철거되고, 철도 복원을 위해 북한으로 기차가 들어가고, 한강 하구를 공동으로 조사하는 등 남북의 적대 관계가 해소되고,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는 그야말로 우리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한해였습니다.

릴케의 시 <가을날>에 나오는 한 구절과 같이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를 넘어, 돌아보면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뿐만 아니라 일 년 내내 역동적인 나날들이었습니다.

 
아직 사법적폐는 그대로이고, 경제민주화는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고, 사립유치원 3법이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는 등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아쉬움과 답답함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지난 한 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나날들로 채워졌습니다.

많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도록 힘든 현실은 그대로이지만, 그래도 자책(自責)을 하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稱讚)을 합시다.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못했다고 책망과 비난을 하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하면서 제야(除夜)의 종소리를 같이 들읍시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낸 우리들은 후손들에게 물려줄 역사의 한 장을 각자의 자리에서 만들어 왔다는 뿌듯한 자부심으로 세모(歲暮)를 맞이할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에겐 복지국가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역사의 새로운 장(章)이 열리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국민들의 삶은 어렵습니다.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아직도 국회에 발이 묶여 있습니다. 김용균법은 어렵게 통과됐지만, 사립유치원 3법은 패스트 트랙을 시작해 빨라도 1년이나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실패한 세력인 구시대의 정당이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며, 국민들의 정서와 상관없이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곳곳에서 발목을 잡아가며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문제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한 것도 문제이지만,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은 문제들이 더 큽니다. 그 후유증이 이제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현 정부뿐만 아니라 차기 정부와 차차기 정부에도 부담을 줄 것입니다. 주력 5대 산업이 모두 위기인데, 미래지향적 구조조정은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고 아직 뚜렷한 대안이 없습니다. 원-하청 관계의 정상화나 재벌 대기업의 갑질을 구조적으로 막아내는 공정거래 관련 법률과 제도들은 변화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을 소리 높게 외치지만, 그 기반이 될 중소기업들에게는 공허하게만 들립니다. 기반 산업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혁신적이고 근본적인 경제의 변화는 기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저임금 인상 정책에만 매몰되어 대기업의 불공정한 배분 구조나 보편적 복지를 통한 임금의 간접적 보전 정책이나, 부동산 보유세 인상을 통한 불로소득의 환수와 경제 구조의 건전한 방향 전환 등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동수당과 기초연금 등의 복지 정책을 통한 가처분 소득의 증가는 부분적으로 성공하고 있고, 지역 상품권으로 발행을 통한 내수 진작 정책도 시장이 반응을 시작했지만, 그 규모나 대상이 아직은 너무 적어 체감 경기의 변화에 이르기에는 미흡합니다.

문재인 케어나 장애등급제 폐지 등 사회분야 정책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경제 정책을 보완할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계 잉여보다 재정의 증가가 적어 결국 긴축 재정이 되어 버렸는데도 정부여당 내에서는 비판하는 목소리조차 거의 없습니다.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돈을 더 써야 할 때임에도, 있는 돈조차 쓰지 않고 재정 건전화의 이름으로 국고로 환수한다면, 어려워진 국민들의 삶은 누가,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요?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가 제대로 추진돼야 공정한 경제와 혁신적 경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이 정부 내에는 아직 많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 정책 간의 상보관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정부 각 부처들이 대통령의 공약과 정책들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촛불혁명의 강력한 여망을 담아 출범한 정권인데, 실력이 없어서인지, 의지가 없어서인지, 가장 중요한 집권 초반 1년 반의 소중한 시기를 안타깝게 보내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을 바꾸면 다 될 줄 알았다면,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지방 권력을 바꾸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발 때문만이 아닙니다. 새롭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에 부합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구체적인 정책과 실행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 필요한 자리에 포진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시, 새로운 100년을 시작합시다.

2019년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임시정부로부터 이어진 대한민국의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은 우금치 마루의 떼죽음으로 억울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일제의 강압한 폭정 속에서 민중들이 스스로 일으킨 3.1만세 운동으로 다시 살아나 새로운 근대국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외세의 힘이나 탁월한 지도자의 헌신이 아니라, 조직 되지 않은 민중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역사는 4.19로 이어져 이승만을 몰아냈고, 이것이 87년 6월 항쟁으로 발전해 그토록 강력해 보이던 군부 독재도 끝장을 냈습니다. 그리고 30년을 면면히 이어와 2017년 촛불혁명으로 박근혜·이명박 정권을 몰아내는 역사로 그 맥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시대는 새로운 혁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복지국가 혁명’입니다. 여야 정치권에서 말로만 외치는 정치적 수사로서의 복지국가가 아니라 국민행복의 길을 여는 진짜 ‘역동적 복지국가’ 말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복지국가로의 전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촛불혁명의 염원은 복지국가 혁명으로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전통과 20대 젊은 나이에 87년 6월 항쟁을 이룩한 세대의 경험은 30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정치적 혁명을 넘어 한 단계 높은 사회경제적 혁명을 통한 완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복지국가 혁명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혁명은 아닙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은 차라리 쉬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혁명은 기득권자들과 곳곳에서 싸워서 쟁취해 내야 하고,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와 산업 체계 그리고 노동시장의 변화와 사회 정책들을 전면적으로 다시 수정해야 실현 가능합니다. 그야말로 어렵고 복잡한 혁명적 변화들이기에 그만큼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삭풍이 부는 한겨울에 가족들을 수레에 실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면서 북만주로 살 길을 찾아 떠났던 우리의 선조들에 비하면, 우리는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 놓은 바탕위에서 조금만 더 바꾸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국민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민중의 자발적 혁명 역사를 가진 민족이고, 그렇게 만들어 온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2019년, 건국 100주년이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여는 새로운 한해가 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힘을 모읍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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