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뉴딜, 새로운 혁신의 계기가 되려면

정완규(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지난 20세기까지 한국 사회는 소수의 위계화된 엘리트에 의해 운영되었다. 관계, 법조계, 언론계, 경제계, 교육계, 학계 등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서 소수의 엘리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들은 학연, 지연, 혈연, 혼맥 등을 통해 그들만의 공고한 성을 쌓았다. 자녀를 둔 학부모의 소원 중 하나가 서울대 입학이고, 고시를 통과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 되는 이유도 이 길을 통해 엘리트 집단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에 들어간다는 것은 부와 권력,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입장권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공중의 등장과 넷크라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변화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서울대 이준웅 교수는 21세기 들어 한국 사회에 인터넷을 매개로 ‘읽고 쓰는 공중’이 출현했다고 말했다. 인터넷 토론 공간을 통해 정부와 언론 등의 권력기관을 비판하고, 토론을 통해 정치 참여의 효능감을 스스로 고양시킨, 다양한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를 가진 ‘비판적 담론 공중(critical discursive publics)이 우리 사회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연구에서 인터넷 공간의 ‘열성 열독자(heavy reader)’는 전체의 5.7%이지만, 읽은 글의 양은 50.6%에 달하며, ‘열성 작성자(heavy writer)’는 전체 토론자의 3.9%이지만, 작성 글의 33.5%를 차지하고 있다는 밝혔다. 이들 읽기와 쓰기에 집중하는 ‘열성 참여자(heavy user)’들이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대체로 인터넷 이용 인구의 3~5%에 해당되는 이들 ‘읽고 쓰는 공중’ 혹은 ‘비판적 담론 공중’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여러 현장에서 기존의 구엘리트 계층과 갈등을 드러낸다.

비판적 담론 공중이 현실 정치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02년 대선 때다. 보수언론이 장악한 언론 환경에서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 담론 공중은 당시 비주류였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 세력으로 결집해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넷크라시(netcracy)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대선 결과는 구엘리트가 독점하던 정치사회 구조가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 담론 공중’에 의해 재편될 것이라는 강력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구시대의 엘리트 중심 거버넌스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와 신화를 공유하는 사람들

최소한 참여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는 성공했다. 하나는 사회개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수구정치세력, 보수언론, 재벌, 관료주의에 빠진 고위관료들, 불공정한 사법기관 등 엘리트들이 작동시키던 거버넌스를 국민들의 품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일이다. 이런 반엘리트적인 사유구조는 노조와 진보언론, 진보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진영을 가리지 않고 확장된다. 물론, 반기득권 성향을 가진 노조나 진보단체들에게까지 기득권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한국 사회가 공정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구엘리트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특권과 반칙에 매우 엄격해졌다는 것은 명백하다.

참여정부가 남긴 두 번째 유산은 ‘비판적 담론 공중’이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결집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들 집단은 자신들이 사랑하던 대통령을 떠나보내면서 노무현 신화와 함께 이 사태를 만든 적에 대한 적개심을 공유하게 되었다.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무리의 숫자와 적의 존재, 그리고 그들이 뭉칠 신화를 만들었고, 문재인 정부의 탄생을 통해 영광의 월계관을 쟁취했다.

이런 현상을 비이성적인 ~빠 문화라고 평가절하 할 수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공유되는 역사가 있고, 신화가 있다. 과거에 보수는 박정희 신화를 중심으로 뭉쳤고, 진보는 전태일의 신화를 공유했지만, 정당성과 영향력에 한계가 분명했다. 하지만 2020년 대한민국에서 움직이는 그들은 무리의 숫자나 영향력, 공유하는 가치관과 정당성, 무엇보다 그들의 의견을 소통하고 공론화할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과거의 세력들과 많이 다르다.
 
반칙과 특권, 그 이면의 퇴행적 엘리트들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구 엘리트 집단들의 조직적 저항에 대응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법조 엘리트라 불리는 검찰과 빚은 갈등, 개혁을 둘러싼 고위관료들의 저항, 극단적이고 적대적인 보도를 한 보수언론, 경제를 볼모로 특권을 요구하던 재벌들, 심지어 같은 진영으로 생각했던 당시 여당과 진보언론까지 합세해 대통령 조롱하기에 나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사회는 끝나야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결국 반칙과 특권 집단에게 지고 말았다.

이후 감옥에 가고, 탄핵 당한 두 대통령을 지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문재인 정부의 입장은 명확하다. “관행으로 여겨온 반칙과 특권이 청년들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2019년 6월 20일 반부패정책협의회) “촛불 민심이 명한대로 국정농단, 반칙과 특권이라는 적폐 체제를 마감하고…”(2019년 5월 9일 취임 2주년 KBS 특집 대담) “…특권과 반칙의 시대는 반드시 끝내야 합니다.”(2019년 4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앞둔 국무회의)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2017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사) 촛불시위에서 드러난 민심을 받아 안은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많은 사건들의 이면에는 반칙과 특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자리 잡고 있다. ‘비판적 담론 공중’의 요구는 간단하다. ‘특권을 내려놓고, 반칙을 저지르지 마라.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 여기에는 진보나 보수, 여당과 야당이 따로 없다.

“비트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지난 인류의 역사를 보면 혁신적인 미디어의 발명이 시대의 대전환을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지식인들이 가장 폭넓은 사상적 자유를 누렸다고 평가받는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의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인 ‘죽간(竹簡)’이 있었고, 중세 유럽의 암흑기를 끝내고 서구 근대사회가 시작된 배경에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있었다.

특정 시대의 질적, 거시적 변화를 이해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고, 사회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 역시 그 사회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관찰함으로 가능하다. 맥루한(M.McLuhan)은 근대의 인쇄혁명과 TV로 대표되는 전자 미디어가 인류 문명에 가져온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였고, 토론토 대학의 교수인 이니스(H.Innis)는 사회의 지배적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사회적 특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하였다. 이들은 한 사회의 존재양식과 그 사회가 취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쇄술의 등장은 인류사를 근본에서 뒤흔들어 놓았다. 인쇄술은 서구의 근대를 만든 토대가 되었다. ‘하버마스(Habermas)는 서구 시민정치의 등장이 가능했던 주요한 이유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이 가능한 정치적 공론장의 형성을 든다. 정치적 공론장의 형성이 가능했던 것은 시민계급 가운데, 문예물, 사회 비판적 출판물, 그리고 신문 등을 읽고 토론했던 이른바 ‘독서 공중(the reading public)’의 출현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서구 사회를 수백 년간 지배하고 있는 문자와 활자로 만들어진 ‘구텐베르크 갤럭시(Gutenberg Galaxy)’는 ‘읽기가 가능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는 디지털 미디어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만들어 삶에 이용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몇 몇 신문사들이 발행부수 100만을 자랑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게시 글 하나가 몇 십만 몇 백만의 조회수와 댓글수를 기록하고, 인기 유튜버가 천 만단위의 ‘좋아요’와 팔로워를 기록한다. 전 세계에서 하루에 생성되는 디지털 정보는 2.5억 엑사바이트(EB.1EB는 약 10억 기가바이트)에 달하고 이는 헤리포터 책 6500억 권에 달하는 양이다. 굳이 수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세계는 디지털화 되었다.

분명한 것은 20세기 말 이래로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봄으로써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 바뀌었고, 그럼으로 우리는 새로운 질서와 규범,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 속으로 편입되었다.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질서와 규범, 가치관과 세계관은 무엇일까?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디지털의 세계는 아날로그로 만들어진 구세계와 어디쯤에서 치열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가? 결국 새로운 질서가 구질서를 몰아내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선의 한 복판에 서있다.

MIT미디어랩의 ‘디지털전도사’ 네그로폰테(N. Negroponte) 교수는 ‘디지탈이다(Being Digital)’에서 디지털 시대의 존재방식을 논하면서, 디지털의 네 가지 강력한 특성 때문에 궁극적인 승리를 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디지털의 4가지 특성으로 탈중심화(decentralizing), 세계화(globalizing), 조화력(harminizing), 분권화(empowering)를 들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디지털이 민주주의의 굳건한 초석이 될 것이란 희망도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나온 말이 “독재여 안녕! 비트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이다.

디지털 기술에 기초해 만들어갈 세상이 ‘디지털 전도사’ 니그로폰테 교수의 말처럼 낙관적일지 아니면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스카이넷’이나 메트릭스에 나오는 ‘마더’가 지배하는 우울한 세상이 될지 현재로선 알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커즈와일(R.Kurzweil)이 이야기한 ‘특이점(the singularity)’이 오거나, 4차 산업혁명 때문에 천지가 개벽할지도 알 수 없다. 굳이 디지털이 가져올 중장기 전망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디지털이 만들 미래사회는 전적으로 기술발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획하고 만들어야 하는 의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무당 점괘 같은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건 디지털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의미이다.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미래를 기획하고, 어떻게 사회를 재조직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새롭게 등장한 ‘읽고 쓰는 사람들’, ‘비판적 담론 공중’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사회든 유튜브가 대중화되고, SNS가 널리 사용되면 그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유튜브와 SNS가 만들어내는 변화는 불가역적이어서 결국 어떤 사회로든 가야한다. 확실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질 사회가 반칙과 특권을 누리는 엘리트들의 사회가 아닐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대압착’ 의지가 빠진 한국판 뉴딜

지난 16일 국회 개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k-뉴딜)을 발표하였다. 현재 코로나19로 전 세계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 정부의 절박함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한국형 뉴딜은 여러 전문가들로부터 산업정책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비판 받기도 한다.

이런 비판과 다르게 본 글에서는 반엘리트적 관점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첫째, 뉴딜(New Deal)은 대압착(The great compression)이라는 사실이다. 경제사학자 골딘(C. Goldin)과 마고(R. Margo)는 뉴딜을 시행하던 미국을 묘사하기 위해 ‘대압착’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대공황 당시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루즈벨트 정부는 최고세율 90%의 소득세를 통해 마련한 자원으로 각종 복지정책과 임금정책을 통해 저소득 계층의 소득을 보전하는 ‘대압착’을 시도했다. 더 나아가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계약권을 인정한 바그너법과 최저임금 및 최고노동시간제를 규정한 공정노동기준법,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이 시행되었다.

둘째, 뉴딜은 ‘대압착’이면서 동시에 ‘조직화’이라는 사실이다. 뉴딜은 국민을 대상으로 취로사업을 통해 떡을 던져주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을 조직화함으로써 객체가 아닌 주체로 세운다. 1935년 바그너법이 시행된 이후 조직 노동자의 수가 대폭으로 증가하고, 새롭게 미국노동총동맹(AFL)과 미국산업별조직회의(CIO)가 새로 출범한다. 양대 노조의 출범 이후 공정노동기준법이 제정되어 최저임금 및 최고노동시간제가 시행되었다. 이후 노동자의 삶은 개선되기 시작했고, 전 국민의 80% 이상이 중산층에 편입되는 ‘황금시대(golden age)’를 여는 토대가 된다.

이번에 발표된 ‘한국판 뉴딜’에는 과거 루즈벨트 정부가 시행했던 뉴딜의 핵심인 ‘대압착’의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고, ‘변화의 주체’를 세우려는 의지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즉, 한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정책적 의지가 부족해 보이고, 무엇보다 변화를 위한 주체가 누구인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2020년 디지털 시대에 관료 엘리트들에 의해 입안되고 추진되는 계획 경제로 향후 대한민국의 100년을 설계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향후 우리 사회가 이런 부분을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고, 또 ‘한국형 뉴딜’의 방법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하겠다.

※ 정완규 위원은 언론학을 전공(언론학 박사)했고, 현재 ‘정책연구소 이음’의 선임연구위원 및 한림대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디지털 미디어 저널리즘’과 ‘불평등 해소 및 사회적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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